말의 무게감
한국인은 죽을 일도 참으로 많다. 힘들어 죽겠고, 배고파 죽겠고, 졸려 죽겠단다. 심지어 '웃겨 죽겠다'라고도 한다. 웃음에서조차 죽음을 찾는 게 한국인이다. 이와 유사한 게 바로 '미치겠다'는 거다. 말이 씨가 된다면 길거리에는 머리에 꽃 하나쯤 꽂고 다니는 사람들로 가득해야 될 거다. 물론, 나 역시 죽겠다는 말과 미치겠다는 말을 자주 사용해왔다. 별다른 위험성을 못 느끼고 서른몇 년을 사용해왔는데, 최근 들어 조심스러워졌다. 이유는 아이가 말을 배우기 때문이다.
'언제 말문이 터질까?'라는 걱정이 무색하게 요즘 아이는 쉴 새 없이 재잘거린다. 계속 쏟아지는 말과 질문에 반응하기 바쁠 정도다. 아직 아이스크림을 "아기찜"이라고 하고 볼펜을 "따뿜", 휴대폰을 "이버던"이라고 의미를 알기 어렵게 발음하는 단어들도 있지만, 제법 빠른 속도로 말을 배워가고 있다.
"주세요"처럼 본인이 필요해서 쓰는 말은 기본이고, "조심해", "위험해"처럼 엄마가 자주 하는 잔소리는 물론, 동네 할머니가 하던 "어디 가니?"까지 빠르게 습득해갔다. 듣고 있는지도 몰랐던 어른의 대화를 따라 할 때면 놀랍기도 하다. 그렇게 점점 어른의 말에 관심이 많다는 걸 깨닫게 되면서 나 역시 '죽겠다', '미치겠다'라는 말이 조심스러워졌다. 말에 무게감을 느끼게 되었다.
습관이라는 게 한순간에 고쳐질까. 그 오랜 기간 입에 붙어있던 단어를 떼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이에게 들려줄 수 있는 꽃 같은 단어가 많다는 걸 매번 기억하며 말하다 보면 부정적인 표현들은 점차 줄어들지 않을까.
아이에게 어른의 말은 또 다른 자양분이다. 듣는 데로 배우기에, 어떤 말의 씨를 심어주느냐에 따라 열매가 달라질 것이다.
최근 2,3년간의 "사랑해", "최고야", "매력 있어" 사용 횟수를 계산한다면, 과장해서 서른몇 년 치와 비슷할 거다. 이런 노력에 보답이라도 하듯, 며칠 전 아이는 “사랑해"라는 말로 큰 감동을 주었다.
미성숙한 발음으로 말을 거는 아이와의 대화는 너무도 즐겁다. 이때, 단어 선택에 신중함은 물론이고 최대한 잘 전달되도록 발음을 또박또박하고 있다. 그렇게 한 단어 단어 말하다 보면, 집안에는 맑은 단어가 흐르게 된다. 아이는 어른의 언어를 정화시키는 힘이 있다. 때문에 할머니는 "웃겨 살겠네"라고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