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사람과 인도를 한 달씩이나 여행해야 하나요?
참 인연이라는 것이 질기디 질긴 것일까?
그 사람 이야기를 시작하는 데 있어서 우선 마음이 짠하고 조금은 슬프며 연민의 정마저 듭니다.
그리고 먼저 밝히고 싶은 것은 나는 냉정하지 못하여 때로는 이성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정에 약하며 조금은 착하다는 사실입니다.
2007년 9월 처음 여권을 만들고 2017년 9월 여권이 만료됐는데도 몰랐던
그런 사람
영어 수준은 굿모닝은 알고 굿이브닝은 모르는 사람
인터넷도 할 줄 모르고 카톡은 들어 본 적이 없으며 겨우 문자만 보낼 수 있는 사람
37년 동안 국도유지관리청 공무원을 봉직하고 퇴직과 동시에 중장비를 사서 노가다를 계속하는 사람
이 글을 쓰는 순간 겨울이라 중장비 투입이 끝나 방학했다고 우울해하는 사람
서너 달 일없는 겨울방학을 못 견뎌하는 사람
일밖에 모르는 사람
부모형제 친척들의 애경사를 가족 대표로 반드시 참석하는 사람
다정다감하고 정이 많아 세상에 쉽게 지는 사람
가족과 그 속의 일가친척들에게 져야 속이 편한 사람
정기적인 행사나 모임에서 가장 말수가 적은 사람
가슴속에 응어리진 게 많아 가끔은 잔기침을 하는 사람
담배와 술이 위안이 되어 그걸로 우울과 슬픔을 삭히는 사람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를 때는 거의 장사익처럼 부르는 사람
또 노래방에서 노래할 때 그 사람 아버지의 18번이었던 <눈물 젖은 두만강>을 한 번은 꼭 부르는 사람
젊었을 때부터 기와공장에서 시다로 일하며 기술을 습득하여 경북 상주 낙동리에 기와를 찍으러 갔던 사람
그 사람 어머니와 동생을 대동하고 낯선 기와공장에서 셋이서 함께 일하며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악다구니로 일한 사람
그리고 거기서 징집영장을 받고 군대를 간 사람
군대 가는 날, 그 동생은 버스를 타고 떠나는 그 사람 뒤를 따라 뛰어가며 눈물을 철철 흘리게 하게 만든 사람
군대 복무 시 그 동생이 서울 종로의 모학원에 공부하러 갔을 때 운전병의 여유로 서울 수색에서 밥을 사준 사람
군대 제대 후 어찌어찌하여 국도유지 사무소에 공무원으로 취직하여 천직으로 37년 동안 도로를 관리 한 사람
폭설 후 말끔히 치워진 도로를 보며 <아! 내가 낸 세금이 제대로 쓰였지는구나!> 그렇게 느끼게 만든 사람
장성한 딸 아들 잘 살라고 지금도 돈을 계속 부치는 사람
그래서 퇴직 후 공무원 연금을 받는데도 계속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
생활의 여유와 마음의 여유까지 잃어버린 듯한 그 사람
그리하여 여권을 생전 처음 발급받아놓고는 진짜 외국 한 번 못 나가 본 사람
가슴속 열정과 바람은 무엇이며 가끔 어떻게 살까 많이 궁금해지는
그런 사람
이 사람이 누군가 하면 나의 바로 위 형입니다.
경상북도 상주 사벌면 낙동리 기와공장에 기와 찍으며 막노동하러 같이 갔다던 그 동생은
바로 나입니다.
중3 때 1년 휴학을 하고 멋도 모르고 따라갔지요.
그때는 참으로 가난해서 우선 먹고사는 게 중요했으니까요.
이렇게 가난했던 원인은 아버지의 실직이었습니다. 경찰공무원으로 근무를 하다가 어떤 사건사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수 틀린다고 경찰서 유리창을 전부 박살내고 사표를 던지고 나왔다고 합니다.
마치 치열한 전투에서 승리 한 무적 해병처럼 막걸리 한 잔 걸치면 가끔 이야기하시던 아버지,
비참하고 가난하게 된 원인은 바로 그거였지요. 경찰을 했던 사람이 다시 취직하기는 힘들었나 봅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이야기이니까 정확히 44년 전,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때 일입니다.
그래서 아들들은 거의 한 번 들어간 직장이 영원한 직업이라고 끝까지, 정년까지 견뎌 내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고 보면 어머니가 대단하신 분입니다. 아버지는 고등 놈팡이로 집에서 빈둥거리며 노는 데 어머니가 삯 바느질과 아모레화장품 행상보따리 장사로 우리 5형제를 다 키웠으니까요.
이런 슬프고 가슴 아린 이야기는 이 정도로 끝내야겠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 들 중에는 우리 가족보다 더 힘들게 사셨던 분들도 계셨을 테니까요.
아래에 실은 사진은 그 당시 --- (1973년 4월 16일부터 5월 31까지)--
경북 상주 사벌면 낙동리 기와공장에서 막노동을 하면서 쓴 어머니의 일기장이자 가계부입니다.
눈물로 읽을 수밖에 없는 가슴 아픈 기록입니다. 그러나 가난했지만 결코 부끄럽지 않은 과거의 삶이었습니다.
참으로 신비롭고 신기하고 텔레파시가 통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일기장을 발견하기 전에 그 사람,
<이제는 둘째 형이라고 부를까요?> 어머니, 그 동생인 내가 경북 상주 사벌 낙동리 기와공장에서 막노동을 했던 이야기를 쓰면서 그 사람을 연민의 정으로 길게 기술했었는데 며칠 후 이 일기장이 발견된 겁니다.
햐~ 이상하다. 신기하다. 이 일기장을 발견하려고 이 글을 쓰기 시작했나? 별의별 생각이 다 듭니다.
강릉 아파트를 팔고 원주로 이사를 갈지도 모른다는 아내의 말에 내 서재에 있는 수천 권의 책 중 쓸데없는 책
(쓸데없는 책은 애초 없습니다. 사실 책을 사기는 쉬워도 버리기는 어렵습니다.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 사색> 책 속에 나오는 말로는 감옥은 나오는 맛에 들어간다는 말은 있지만... 책은 한 권 두 권 모으는 재미도 쏠쏠합니다.)을 선별하여 차근차근 버리는 중에 귀한 보물처럼 어머니의 작은 일기장이 발견된 것이지요.
<시간의 걸음걸이에는 세 가지가 있다. 미래는 주저하면서 다가오고, 현재는 화살처럼 날아가고,
과거는 영원히 정지하고 있다.> -- 실러
과연 실러의 명언처럼 과거는 영원히 정지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눈물로 읽을 수밖에 없는 어머니의 가슴 아픈 이 일기장을 보며 과거가 과거로 정지하지 않았고 계속 숨 쉬고 있었던 게지요.
<현재를 치열하게 잘 살아라, 미래는 주저되더라도 신중하라.> 이렇게 충고하면서....
<영원히 살 것처럼 꿈을 꾸고,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아라.>--제임스 딘
<Dream as if you'll live forever, Live as if you'll die today - James dean.>
이 명언은 현재가 지금이고, 미래는 장차 내일부터 다가올 것이지만, 과거가 그 바닥이 되어 있었기에 이런 말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정호승의 시 <바닥에 대하여>가 생각납니다.
나는 그 <바닥>이 몹시 쓰리고 아픈 우리들의 <과거>로 자꾸 읽힙니다.
바닥에 대하여 -- 정 호 승
바닥까지 가본 사람들은 말한다
결국 바닥은 보이지 않는다고
바닥은 보이지 않지만
그냥 바닥까지 걸어가는 것이라고
바닥까지 걸어가야만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바닥을 딛고
굳세게 일어선 사람들도 말한다
더 이상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다고
발이 닿지 않아도
그냥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바닥의 바닥까지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도 말한다
더 이상 바닥은 없다고
바닥은 없기 때문에 있는 것이라고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라고
그냥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2007년 9월 생애 처음 여권을 만들고 2017년 9월 여권이 만료됐는데도 몰랐던 그런 사람과 한 달 넘게 인도를 같이 가야 하나?>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지난 일요일 상황으로 거슬러 갈 수밖에 없습니다.
경북 상주 낙동리 기와공장에 막노동을 하러 같이 같던 그때 그 어머니의 88세 생신 축하 오찬 회동 때의 형제들 간에 나눈 대화가 문제였지요.
형제계 총무를 맡고 있는 그 사람 아내가 말합니다.
"형제계에 모인 돈이 제법 됩니다. 저번에 어머니 집 화장실 수리비로 200을 지출하고도 많이 남았네요. 내년 1월에 셋째 삼촌도 공로연수에 들어가서 시간이 나고 생일도 1월이네요. 또 큰 아주버니 생일도 1월이니 1박 2일이던지 2박 3일이던지 덕구온천쯤이던지 더 남쪽이던지 여행을 갑시다"
이 말에 모두들 동의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나만 빼고....
총무의 긴급 제안에 나는 움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월 6일부터 한 달 넘게 남인도를 가기로 확정되어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맛있던 돼지갈비가 갑자기 맛이 없어집니다.
또 왜 그리 새까맣게 빨리 타는지 불판을 벌써 세 번씩이나 바꾸었습니다.
자꾸 목이 턱턱 막혀 정선 곤드레 막걸리를 연거푸 두 잔을 들이켰습니다.
운전만 아니면 한 두 병 해치우고 싶더라고요.
"그래요 좋네요! 올해 간다 간다 하고서 못 간 거 내년 1월에 바로 갑시다"
이 사람도 저 사람도 모두 동의를 합니다.
어머니도 "너희들이 좋다면 무조건 따라 가마"라는 동의의 표정을 지으며 소녀처럼 마냥 웃습니다.
"나는 사정이 있어 불참하지만 어머니 모시고 한번 다녀오시지요"라는 나의 말에
<너는 왜 못 가는데...?>
하는 표정으로 모두 내 얼굴을 쳐다봅니다.
"글쎄, 공로연수도 들어가고 하니 이것저것 생각할 것도 많고 갑작스럽게
<출근하지 마> 하니 정체성 혼란도 생기고 고민거리도 제법 생겨서..."라고 말끝을 흐렸지요.
그리고 인도로 배낭여행을 한 달 이상 간다고 끝까지 말하기 싫었습니다.
그렇게 가족여행 건은 결론이 안 나고 지루하고 회피하고 싶었던 어머니 생신축하 오찬이 끝났습니다.
그래도 어머니는 형제들이 막내만 빼고 모두 모였다고 흐뭇해합니다.
그건 분명 위안입니다. 88세인데도 건강하시니까 더욱 반갑습니다.
요사이는 식사 후 차 마시러 가는 게 유행입니까?
"멋진 카페가 있으니 차나 한 잔 마시러 갑시다"라는 한 사람의 제안에 2차로 <뒤뜰>이라는 카페로 우르르 몰려 갑니다. 거기서 이런저런 이야기 어머니 건강과 가족 간의 안부나 손자들의 이야기를 나눕니다.
주로 손자들의 이야기에 모두 신이 났습니다.
나보고 "손주는 언제 보냐?" 묻습니다.
"걔들이 살기 힘들어 언제일지 몰라" 내가 한 말은 이게 전부입니다.
나는 그저 듣기만 했으니까요. 별로 할 말이 없었습니다. 형제간에도 조금은 소원해졌으니까요.
총무인 그 사람의 아내가 가족여행에 대해 다시 이야기를 꺼냅니다.
"여기서 여행 날짜와 장소를 정합시다."
<1월 첫 주가 좋으니 둘째 주가 좋으니 1박 2일이 좋으니 2박 3일이 좋으니 덕구온천이 좋으니 수안보온천이 좋으니 더 남쪽으로 내려가야 막내가 합류하기 좋으니>등 의견이 분분합니다.
나는 끝까지 벙어리 냉가슴이 됩니다.
그 사람의 아내가 나를 보고 정색을 하며 다그칩니다.
"삼촌은 언제, 어디로 가는 게 좋아?" 단호하게 묻습니다.
아이고^*^
그때도 끝까지 나의 <시크릿 남인도 여행>은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여러분도 그때의 상황을 접했더라면 비밀스럽게 지켜왔던 <홀로 인도 여행>을 발설 안 하고는 못 배겼을 겁니다.
"사실 나는 1월 6일부터 한 달 동안 공로연수 기념으로 남인도를 여행하려고 해요."
모든 시선이 나에게 쏠립니다.
<혼자 가는 게 맞느냐, 어디로 가느냐, 인도는 여행하기 힘들다는데 왜 하필 인도냐, 류시화가 인도 여행의 붐을 일으켰다는데 지금도 그때의 향수가 남았으냐, 북인도, 타지마할, 바라나시 등이 대표 여행지인데 왜 남인도냐, 인도를 두 번씩이나 다녀왔으면 됐지 왜 또 인도냐 등등> 우리들만 손님인 듯, 전세 낸 듯 <뒤뜰>이 <안뜰>이 된 것처럼 여행 이야기로 시끌시끌합니다.
멕시코 <칸쿤>까지도 가 본 여행 마니아 큰형 내외가 큰 관심을 가집니다.
수시로 친구들과 부부동반으로 자주 해외를 다녔던 누나 매형도 나를 빤히 쳐다봅니다.
한 번도 해외를 나가본 적이 없던 그 사람도 동경의 눈으로 나를 쳐다봅니다.
오찬 때부터 거론되었던 1월의 가족여행은
나의 남인도 여행 계획 발표로 2월 말이나 3월 초로 연기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데....
여기서부터 곤란하고 난처한 일이 <드디어> 발생하고 맙니다.
그 사람의 아내가
"삼촌! 이 사람 데려가면 안 될까?"
어머니도 한마디 거듭니다.
"그래! 해외를 한 번도 안 나간 사람 한 번 데려가라 부탁한다"
나원 참!!!
3박 5일 동남아도 아니고 열흘 유럽도 아니고 이 분들이 대체?.....
에~효 @#@
글머리에 밝혔듯
<나는 냉정하지 못하여 이성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정에 약하며 조금은 착하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진짜 문제입니다. 이렇게 글을 시작하였 듯
<그 사람 이야기를 시작하는 데 있어서 우선 마음이 짠하고 조금은 슬프며 연민의 정마저 듭니다.>
<참 인연이라는 것이 질기디 질긴 것일까?>
인연의 끈은 이렇게 질깁니까?
여러 명의 형제 중 왜 하필 그 사람입니까?
그것도 그 사람 해외여행의 스타트가 왜 고난의 인도 여행 한 달씩이나 입니까?
그렇습니다.
그 사람의 아내가 얼마나 진지하게 애원하는지....
돈은 다 낼 테니, 나보다 돈이 더 들더라도 꼭 데려가 달라고....
일없어 괴로운, 겨울방학을 못 견뎌하는, 그 사람 제발 데리고 가 달라고 얼마나 간곡하게 부탁을 하는지....
어머니는 왜 또 하필 그때 거들면서 지극정성으로 부탁을 하시는지.....
아~~ 흐!!
그때 정신을 똑바로 차렸어야 했습니다.
심호흡을 한 열 번 정도 했으면 <안돼요!!>라는 반전이 일어날 수도 있었습니다만...
아이고!!! 나도 모르게 승낙을 하고 말았습니다. 정말 조금은 어리숙하고 바보 같았습니다.
이렇게
나의 공로연수 기념 <원대하고 환상적이고 고난의 연속이어서 즐거울 나 홀로 남인도 여행 한 달>이
한 순간, 정말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여권은 있어요?" 물으니
"있지!"
바로 그 사람 집으로 달려갔지요.
허허허... 2017년 9월에 만료된 여권이더군요.
몇 번을 확인했지만 분명 6개월이 남고 자시 고도 아닌 정말 쓸데가 없는 여권이더군요.
참으로 딱한 그 사람입니다.
자기 여권이 만료된 줄도 모르고 있으니....
급해졌습니다.
남인도를 데리고 간다고 가족들 앞에서 공언했으니 항공 발권이 우선 급합니다.
인도 국내선이야 위약금을 물더라도 변경하면 되지만 내가 발권한 코친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항공권이 있는지가 우선 다급합니다.
나와 같은 비행기가 아니면 그 사람은 국제미아가 될게 뻔하니까요.
<월요일 군청에 가서 여권 재발급하는 방법, 여권사진은 두 종류로 인화해야 한다, 인도 비자사진은 미국 여권사진이어야 한다, 여권이 나오면 바로 강릉으로 가지고 오라> 등을 시켜 놓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날 밤 초초한 마음으로 인터넷을 켜고 클리어 트립에 들어가 봅니다.
앞으로 추진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 같아 그저 막막할 따름입니다.
여행은 갑자기 시작 단계로 전환됐는데 그 사람 여권은 아직 받지도 못했습니다.
과연 어떻게 그 사람을 대동하여 한 달이 넘는 남인도 여행을 마칠까요?
바보 같은 나!!!!!
정이 많고 착하고 냉철하지 못해서 가끔 세상에 속아 넘어가는 나!!!!
나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몇 명이나 있을까요.
지금도 열심히 인터넷 검색 중입니다.
아울러 한 달도 안 남은 기간 동안 그 사람을 집중적으로 여행 훈련을 시킬 작정입니다.
여행책도 읽히고 인터넷도 보게 하고 아주 기초적인 영어회화도 배우게 하고 카톡도 개통시키고....
수능처럼 그 사람에게 여행 시험을 보게 하면 어떨까요?
초보 수준일지라도 어느 정도 <해외여행의 노하우>를 습득하지 못한다면
당초 계획대로 나 혼자 가야 될까요?
일요일 오후부터 심각한 고민으로 잠을 못 자 졸린 오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