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의 왕 베르디

by 김재완

헬로우 에브리원!

나는 여러분의 교양미를 충전시켜줄 스토리텔러 X라고 해. 물론 당만 충전해도 살아가는데 어려움은 없겠지만, 교양미까지 충전된다면 우리의 삶이 훨씬 더 윤택해질꺼야. 그럼 첫시간으로 오페라의 왕 베르디에 대해서 알아보자고!


오늘날 오페라의 적자인 뮤지컬은 브로드웨이는 물론 한국사회에서도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지만, 대부분이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말로 되어 있는 오페라는 아직도 우리에게 멀게만 느껴 지는 것이 현실이야. 여라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듯한 과장된 몸짓, 힙합과 R&B에 이미 최적화된 우리의 청각에 익숙하지 않은창법도 한 몫을 분명히 할 꺼야. 이러니 어쩌다 초대권이 생겨서 멋진 오페라 극장에 찾아가도 친절하지못한 극 전개에 졸음과의 전쟁이 발생할 뿐이야.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영화는 스포일러 금지가 필수이지만, 오페라는 반대로 대략적인 줄거리를 알고 가는 것이 졸음방지에 필수야. 오페라를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지루하게 느끼는 가장 큰 이유는 사전 지식의 전무함이라고 생각해. 반드시 최소한의배경지식 및 줄거리를 확인 하고 가서 아름다운 아리아도 즐기고 옆 사람에게 교양미를 뽑내보자고!


자 그럼 이제 19세기바그너와 함께 오페라의 양대 산맥이라 불리던 오페라 작곡가 베르디와 그의 히트작인 아이다에 대한 친절한 스포일러를 보러 가자고. 아이다는 국내에서는 원조요정 핑클의 옥주현씨가 출연하는 걸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하지.


베르디는 1813년이탈리아의 부세토라는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어. 부모님으로부터 물려 받은 것은 뛰어난 음악적 DNA뿐만 아니라 지독한 가난도 있었어. 어려서부터 음악에 유달리관심이 많았지만 정식 음악교육은 꿈도 꿀 수 없었고 그저 교회에서 울려 퍼지는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갈증을 달래고 있었지. 하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과 뛰어난 재능으로 드디어 고향 마을에서 제일 잘 나가는 ‘교회오빠’가 되었어. 기적이일어나지 않은 이상 베르디는 피아노 잘 치는 교회오빠로 살아가다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갈 운명이었어. 하지만그의 인생에 키다리 아저씨가 등장을 하니 그의 이름은 안토니오 바레치.


훗날 베르디의 장인이 되는 지역의 독지가였어.

“오늘부터 제대로 된 피아노 레슨을 내가 시켜주마. 돈 걱정은하지 말고 네 재능을 마음껏 펼쳐 보거라.”

베르디는 이제 최저시급을 받으며 알바를 할 필요가 없어졌어. 키다리 아저씨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베르디의 피아노 실력은 수직 상승 하였고,기고만장해진 그는 기대에 찬 채 밀라노 유학 길에 오르게 되었어.

‘내가 시골에 묻혀 지내서 그렇지 도시 놈들에게 재능에서 뒤질 것은 하나도 없다. 어디 시골 쥐의 매서운 맛을 한 번 보거라.’


여기서 잠깐 역사상식 짚어 보고 가자고. 이 당시 이탈리아는 외세의 침략에 갈기갈기 찢어진 상태였어. 로마제국의후손들이란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야. 그래서 베르디가 밀라노로 갈 때는 여권이 필요했었다고 해.

어찌되었건 우리의 주인공 베르디는 청운의 꿈을 안고 밀라노에 입국(?) 했어.

하지만 밀라노 음악학교에 피아노 특기 생으로 입학하기위해 실기시험을 마치고 난 후 그의 꿈은 산산조각이 나버렸어. 마치 위플레쉬의 빡빡머리 플랫처 같은교수의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냉담한 평가 한 마디로 말이야.

“이봐 시골 촌뜨기! 너는 우선 서류심사에서도 탈락인 걸내가 실기 시험이나 보게 해준 거야. 18살이면 우리 학교 입학 기준 나이에서 이미 4살이나 넘겼어. 재능도 없고, 오직눈빛은 살아 있어. 피아노가 오기와 끈기로 잘 치게 된다면 이 세상 모두가 쇼팽이 되었을걸?. 같은 나이 또래는 물론이고, 한 세대 아래 아이들 보다 나을게없어. 헛된 꿈 꾸지 말고 다른 길을 찾아 보는 게 자네를 위해서 좋을 거야.”


이런 걸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하나?

피아니스트의 꿈을 일찍 포기한 베르디는 작곡가로 성공하기로 결심을 하고, 밀라노에서 작곡 공부를 시작 하게 되었어. 밀라노에서짧은 유학 생활을 마친 베르디는 데뷔 음악회를 열기 위해 고향으로 귀향을 하게 되었는데, 무명의 신인작곡가가 밀라노라는 대형마켓에서 데뷔가 쉬웠겠어? 그의 데뷔무대는 영원한 키다리 아저씨 안토니오 바레치의집 정원 이었어.

“진짜 저 인간은 전생에 무슨 공덕을 쌓았길래 저런 후원을 받나 몰라?듣자 하니 바레치가 자기 딸의 음악선생으로 베르디를 붙였다고 하던데.”

“말이 음악선생이지 결혼으로 가기 위한 예비관문이지 머. 부럽다! 베르디.”

주변의 시샘에도 불구하고, 배르디는 바레치의 딸과 결혼에 골인하고, 장인의 확실한 후원을 받고다시 밀라노 유학 길에 오르게 되었어.

“선생님! 아니 장인어른!다시 한 번 밀라노에 가서 도전을 해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베풀어 주신 은혜에 보답 하기위해서라도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이제 저도 애 둘 딸린 유부남입니다.오직 음악에만 승부를 걸어서 남 보란 듯이 성공해서 금의환향 하겠습니다..”


흙 수저로 태어났지만,좋은 후견인을 만나 탄탄대로만 걷던 베르디를 신이 질투 한 것일까? 베르디의 금쪽 같은두 딸은 돌잔치만 겨우 마치고 생을 마감하였고, 이 충격인지 그의 부인도 26세의 나이로 그만……

“아니 이게 먼 일이래? 베르디 그 양반 충격이 이만 저만이아니겠어? 일이 손에 잡히겠어?”

“말도 말아. 지금 작곡가로서의 생명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생명이 위태로울 지경이라는 구만. 거의 정신이 나갔다고 하던데, 아까운인재 하나 잃는 거 아닌가 모르겠어.”


베르디가 절망의 끝에 있을 때 동아줄이 되어 준 여인이있었으니 그녀의 이름은 주세피나 스트레포니!

그녀는 같은 극장의 주연 가수였어. 요즘으로 치면 대형기획사의 최고 작곡가와 걸 그룹 센터의 만남이라고 나 할까?

베르디는 그녀의 도움으로 마침내 재기를 할 수 있었어. 그의 재기작품은 나부코라는 오페라였어. 당시 시대 상황과 절묘하게맞아 떨어진 탓으로, 그는 일약 국민 작곡가 반열에 오르게 되었어.

오페라의 내용이 포로로 잡혀 억압 받는 유대인의 이야기야. 앞서 언급 했듯이 이탈리아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등의 압제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탈리아 국민들은 이 오페라를 통해서 사이다 1.5리터를 원샷 한듯한 통쾌함과 용기를 얻었던 거야. 하지만 너무 높아진 유명세는 두 사람의 애정전선에 먹구름을 몰고왔어.


“아니 베르디 같은 국민 작곡가가 그런 천박한 여자와 계속 만나는 이유가 머야? 그 여자 전적이 화려하잖아. 유부남과 바람을 펴서 자식까지 있는여자가 어떻게 감히 우리 베르디와……”

“어허. 너무 그러지 말게.어쩌면 오늘날의 베르디는 그 여자가 만들었다고 볼 수 있어. 전처와 자식을 잃고 사람꼴도아닌 베르디를 다시 작곡가로 만든 건 주세피나야.”

“그래도 이탈리아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데? 국민 작곡가에게전혀 어울리지 않는 여자야.”


실제로 여론이 둘의 사랑에 호의적으로 돌아서는 데는 꽤오랜 시간이 걸렸어. 하지만 그녀는 훗날 아이다 극본 작업에도 동참하며, 베르디의 확실한 뮤즈로 자리를 잡았어. 그녀의 내조 덕분인지 베르디는국민작곡가의 명성을 등에 업고 47세 때는 국회의원으로도 선출되었고,환갑을 몇 년 앞둔 어느 날 이집트 국왕으로부터 오페라 작곡의 오퍼를 받게 되었어.

“여보. 이집트 측에서 백지수표를 보내왔소. 수에즈 운하 개통 기념으로 초대형 오페라를 제작 해 달라는데 영 마음이 내키질 않소.”

“그래요. 이제는 당신 마음이 내키는 작품만 하세요. 국제 정세도 어수선하고 대형 작품을 하기에는 좋은 시기는 아닌 거 같아요.”


하지만 이집트 국왕의 끈질긴 구애와 기대 이상으로 잘쓰여진 원작을 본 후 베르디 부부는 마음을 돌렸어. 하지만 뿌리치기 힘든 거액이 통장에 입금 된 것이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헐리우드 스타들이 입금과 동시에 조각 같은 몸으로 변신 하듯이 말이야.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의 유혹을 뿌리치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야. 하나도받기 힘든 미슐랭 스타를 14개나 보유하고 있는 고든램지가 CF에서한국 맥주가 맛나다고 엄지척을 할 줄 누가 알았겠어.


다음 시간에는 베르디의 대표작 중 하나인 오페아 아이다의내용을 방구석에 앉아서 감상해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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