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수록 추억을 들추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인간의 기억이 왜곡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고통스러웠던 일은 망각의 힘을 빌려 극복하고, 힘들었던 기억은 미화시키며, 좋았던 기억은 증폭시킨다.
삶은 언제나 고되었고, 다가올 날들도 결코 녹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입에 단내가 나고, 스트레스로 인해 위액이 역류할 정도의 힘겨운 날도 또다시 견뎌낼 것이다. 고난은 더 큰 고난으로 넘고, 역경은 성장의 추친체로 사용하며, 찰나에 불과한 행복했던 일은 영원으로 기억할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인생은 순간의 행복과 지속적인 고통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우리에게는 고통조차 추억으로 변환시키는 방어시스템이 있는 듯하다. 아무리 힘든 삶을 산 이들도 늘 그때가 좋았다고 말하니까.
오늘 하루도 다채로운 이유로 힘들었던 당신을 위해 추억여행을 준비해 보았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 기반한 것이라 세대통합에 성공하기는 어렵겠지만, 레트로가 대세라고 하니 MZ들도 일정 부분 공감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HJ는 김을 너무 좋아해, 비빔밥에도 조미 김을 싸 먹는다. 나는 HJ의 주특기인 김밥은 좋아하지만, 시중에서 파는 김에 밥을 더 이상 싸 먹지 않는다.
참기름과 소금만으로도 천상의 맛을 내던 엄마의 구운 김, 세월로 익힌 메주로 만든 외할머니의 청국장이 그립다. 별이 아무리 많이 달린 식당에서도 맛볼 수 없고, 배달도 되지 않는 그 시절의 음식이 그립다. 입천장이 벗겨질 정도로 뜨거운 국물과 활화산 같은 열탕이 시원하다던, 두 아들을 씻기고도 바나나 우유 하나로 거뜬했던 젊은 아빠가 그립다.
어른이 되고 놀란 것 중의 하나는 초등학교의 작은 운동장이다. 아이들의 운동장은 어떤 이유로 작아진 것인가? 요즘 아이들이 약해졌다거나 버릇없다는 말은 고대부터 존재해 왔다. 그러나 불과 수십 년 전의 우리보다 지금의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열악한 환경에 놓여있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백 미터가 직선으로 뻗어있던 운동장, 아이들의 수호신 플라타너스 나무, 몸과 마음을 한 뼘씩 자라게 하던 탐구생활과 방학, 학원에 가지 않아도 친구를 만날 수 있던 비좁은 골목과 그 골목을 가득 채우던 젊은 엄마의 힘찬 목소리가 그립다.
어린 시절 ‘웃으면 복이 와요’ 란 코미디 프로의 한 코너에서 미래에는 공기와 물을 사서 마신다는 설정을 보고 온 가족이 박장대소했던 기억이 있다. 백 년도 지나지 않아 코미디가 현실이 되어버렸다.
온종일 구슬치기와 고무줄놀이를 해도 미세먼지 걱정 없던 청정한 대기, 갈증이 나면 서슴없이 마시던 수돗물, 다슬기와 송사리가 널려있던 냇가, 개발이란 이름으로 더럽혀지지 않은 환경이 그립다.
기술의 진보로 우리가 또 다른 의미의 배달의 민족이 된 후, 몸은 게을러지고, 마음은 조급해졌다. 무어의 법칙을 넘어서는 속도로 인간을 배려하지 않는 기술의 발전은 전혀 반갑지 않다.
커피 쿠폰 대신 음악을 선물하고, 단체 문자 대신 크리스마스 카드를 고르던 시절의 손때 묻은 번거로움이 그립다. 며칠이 지나야 그날의 그 순간을 다시 볼 수 있던 필름 사진, 좋아하는 노래를 담기 위해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던, 더딘 기다림 후 찾아오던 황홀경이 그립다. 누군가의 일촌이 되기 위해 부지런한 다람쥐가 되었고, 나를 닮지 않은 미나미로 파도를 타고 들리던 그 사람의 미니홈피. 비밀스러운 개방성과 틈새 폐쇄성이 공존하며 버그를 일으키던 그 시절이 그립다.
추억이 아름다운 이유는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욕심을 조금 덜어내고, 선한 의지를 가진다면 되찾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지친 우리에게 필요한 옛 것들이 있다.
계약직이란 단어가 생소하고, 사람이 먼저라는 카피가 굳이 필요하지 않던, 투박하지만 온정이 있던 시절이 그립다. 무엇보다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다는 신화가 유효하던 시절의 무모한 낭만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