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도와 부채감 사이에서 고민하는 당신에게

by 김재완

1974년, 경북의 군 단위 농촌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나는 엄마만 모르는 편애 속에 귀남이로 자랐다. 한 집에서 동생들보다 엄마의 사랑을 더 받고 자라는 것은 행복감의 두 배에 이르는 책임감을 이고 살아가는 것이었다. 9남매의 셋째로 태어나 장남인 큰 오빠를 추앙하는 가정분위기에서 자라온 엄마에게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결혼을 앞두고 이모가 나에게 들려준 말은 -힘겹게 버텨온- 나의 마음에 지구 하나를 더 얹어 놓았다..

“엄마한테 너는 아들이자, 남편이고, 친구고 희먕이다. 엄마가 널 어찌 키웠는지 너도 잘 알지? 엄마한테 잘해야 한다.”

유년시절 내가 또래보다 빨리 철이 들었던 이유는 엄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 흔한 오락실, 롤러 장 한 번 가지 않았으며, 엄마가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는 어른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엄마는 애 같지 않은 나를 더 대견하게 여겼고, 우리는 완벽해 보이는 모자였다.

글을 쓰기 전 단 하나의 꿈은 농구선수였다. 반백 년을 살아온 오늘날까지도 농구에 대한 열정은 여전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진 꿈이 농구선수였다. 그러나 당시 운동선수에 대한 시선은 오늘날과 많이 달랐고, 엄마가 싫어할 것 같다는 이유로 나는 유일했던 꿈을 구겨서 던져버렸다. 자타공인 효자 소리를 듣는 내가 엄마를 심적으로 유일하게 힘들게 했던 시기가 농구선수에 대한 꿈을 접은 중학교 입학 무렵이었다.


나이를 먹고 어른의 세계로 진입하며 엄마에게 보답해야겠다는 책임감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평생 고생만 하며 나만 바라보고 사는 듯한 엄마가 불쌍했고, 엄마를 구원해 줄 사람이 이 세상에 나 밖에 없다고 생각하면 가슴 한편이 답답하기도 했다. 그런 마음이 들 때면 죄책감으로 더 괴로웠다.


엄마들이 위대하지만 우리 엄마의 사랑은 조금 유별났고, 친구들은 1995년의 그때 그 사건을 들먹이며 여전히 들먹인다.

그 해 여름의 기록적인 폭우는 나의 군생활을 출발부터 삐그덕 거리게 만들었다. 민통선 안에 위치한 독립포대로 자대배치를 받은 나는 며칠 째 쏟아지는 폭우로 밤잠을 설치고 있었다. 비가 그치지 않는다면 부모님과의 첫 면회가 무산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유독 잘 맞는 것은 기분 탓일까? 목요일 밤 부대와 세상을 잇는 유일한 다리가 급류에 휩쓸려갔다. 부대의 부식차도 접근할 수 없었다. 고향집에 전화를 해 면회불가 소식을 전했다. 엄마는 의외로 차분하게 대답했다. 엄마의 의지를 아는 나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엄마가 알았다고 대답한 것이 아니라 알아서 하겠다고 대답했기 때문이다. 그날 밤 비가 그쳤다. 설마?


엄마는 예정된 날짜보다 하루 늦은 일요일에 부대 앞에 나타났다. 경상도에서 자동차도 없이 오직 대중교통으로 2박 3일 만에 도착한 것이다. 아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먹이겠다는 일념으로 오단 찬합을 양손에 든 채로.

비는 그쳤으나, 이십 미터에 이르는 냇가는 강으로 변해있었다. 아들을 보겠다는 엄마와 면회가 불가하다며 집으로 돌아가라고 소리를 치는 위병소의 병사가 대치하고 있었다. 위병소를 지키던 병장이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면회는 불가능해 보였다. 아버지가 예상과 달리 늦게 포기했을 때, 엄마는 예상대로 신발을 벗고 찬합통을 머리에 인 채, 급류 속으로 뛰어들었다. 위병소의 병장은 즉시 부대의 중대장에게 연락을 취했다.

“중대장님 물살이 너무 셉니다. 어머니가 위험합니다. 제가 들어갈랍니다.”

“지랄하지마라. 위병소 벗어나면 니는 영창이다..”

“어?어?어 막. 휘청거립니다.”

강한 물살로 인해, 20대의 장병들도 돌다리를 만들던 작업을 중단한 상황이었다.


한 사건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수많은 인연과 갖가지 인과관계가 복합적으로 맞아떨어져야 한다. 위병소의 병장은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떠나보냈고, 우리 엄마의 무모한 행동에 감정이 격양되고 말았다. 그는 중대장의 명령을 무시하고, 총을 내려놓더니 망설임 없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경상도 아주머니와 경상도 군인이 혈연을 뛰어넘어, 서로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이를 보고 있던 거제도 출신의 경상도 중대장은 육두문자를 섞어 가며, 나와 그 병장를 동시에 영창에 처넣고 말겠다고 부대가 떠나가라 소리를 질러댔다.

그 순간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평소 느려터지 기만하던- 병장 무리들이 위병소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 들은 능숙하게 엄마는 둘러업고, 엄마가 시골에서 가져온 음식과 수정과를 머리에 인 채, 물을 건너 내무반에 도착했다. 이등병이었던 나는 이 난리통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달리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나? 비에 젖어 눅눅하던 부대는 엄마의 돌발행동으로 인해 눈물이 더 해졌으나 습기보다 온기가 느껴졌다.


엄마 품에 있는 동안은 물론이고, 둥지를 벗어나서도 나는 큰 사랑에 기대어 험난한 세상을 헤쳐나갔다. 그러나, 아무리 갚아도 줄지 않는 부채처럼 엄마의 사랑에 보답하는 일은 요원하게 느껴졌다. 내 가슴을 무겁게 누르고 있는 것이 부채감이라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HJ와 결혼을 했다.


무지한 나를 깨운 것은 HJ의 울음이었다. 별일도 아닌 일에 불같이 화를 내는 나를, 언제나 물처럼 감싸주던 HJ의 유연함이 무너진 날이었다.

“결혼 삼 년이 지났는데, 나는 언제 자기 가족으로 받아들여 줄 거야?”

나는 표면적으로는 남편의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한 것처럼 보였고, HJ도 그렇게 느낀다고 혼자 판단했다. 그러나 나의 우선순위는 늘 엄마였고, 내가 선택한 가족인 HJ를 마음으로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결혼식을 올리고 혼인 신고만 하면, 바로 가족이라는 유대감이 생길 거라고 착각했다. 나는 속마음과 무지함을 동시에 들켜버렸다. 늘 잘난 척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벌리는 쪽은 나이지만, 세상의 큰 이치를 일깨워주는 이는 HJ이다.


다음 날, 점심시간을 이용해 산책을 하며 ‘월말 김어준’을 들었다. 김어준은 한국 사회의 자식들이 부모에 대해 가지는 부채감에 대해 이야기했다. 부모에 대한 효도의 마음을 부채감으로 표현하다니 역시나 그는 불경스럽기 그지없다. 그러나 잠시 후, 나는 그의 말에 완전히 공감했다. 엄마의 사랑에 대한 부채감에서 벗어나야 하는 사람은 나였고, 모두의 행복을 위한 길이었다.


엄마와 나의 관계를 돌아보았다. 놀랍게도 엄마는 성인이 된 나에게 단 한 번도 무엇을 요구하거나, 지시하거나, 결정에 관여한 적이 없다. 이모와 친구들, 나의 예상까지 깬 대 반전이었다. 대학과 전공선택, 입영연기, 서른 살의 늦은 어학연수, 잦은 이직, 월급관리, 늦은 결혼과 아이가 없는 삶을 선택하기까지 엄마는 늘 나의 선택을 존중해 주었다. 또한 단 한 번도 자신이 준 사랑에 대해 상환을 요구한 적도 없다. 나는 존재하지도 않는 엄마에 대한 부채감을 상환하기 위해 혼자 발버둥 친 것이다.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은 폭포와 같다. 내리사랑은 가능하지만, 떨어지는 물만큼 위로 올릴 수는 없다. 나는 마흔이 넘어서야 나의 한계를 인지하고, 엄마가 진정 원하는 것 또한 깨달았다. 엄마가 자식에게 원하는 것은 자식의 행복이다. 엄마에 대한 부채감을 스스로 탕감시킨 나는 더 자주 전화화고, 이따금 사랑한다고 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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