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다른 여행 법 : 제주 올레

by 김재완


오십을 목전에 두고 400킬로가 넘는 제주 올레길 종주에 도전하게 된 경위는 분노, 호기심, 설렘의 3단계를 거치면서이다. 분노는 당연히(?) 회사에서 촉발되었다.

업무능력보다 사내 정치에 능한 A는 빛의 속도로 부장으로 승진했다. 임원들은 닥치고 일만 하며 회사에 실적으로 기여하는 직원들보다 근무시간에 자신들의 방에 들러 티타임을 가지는 A가 회사에 더 필요한 존재라고 판단한 것일까?

저녁을 먹으며, HJ에게 임원이라면 잡초와 난초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한탄하자 놀라운 대답이 돌아왔다.

“잡초인 줄 알고도 가꾸고, 난초인 줄 알고도 뽑아버리건 아닐까?”

나는 HJ의 식견에 놀라며, 난초도 아닌 주제에 더 격분하였다.


두 번째 단계인 호기심은 사방이 막힌 듯한 세상에서 몇 안 되는 숨구멍 중 하나인 독서에서 발화되었다. 발화점은 유시민, 조정래, 손석희의 추천 책인 ‘영초 언니’였다. 소설 ‘영초 언니’는 유신정권 시절, 운동권에 전설로 남은 실존 인물의 생을 다룬 책으로 저자는 제주 올레길을 만든 서명숙 이사장이다. 실화를 기반으로 한 책의 내용에 따르면, 저자가 도시에서 받은 상처를 치유한 곳은 올레 7코스에 위치한 외돌개라고 한다. 7코스는 내가 처음 걸어본 올레길이며, 비현실적인 경치에 걸음걸음을 떼기가 힘겨웠던 길로 기억한다. 몇 코스 걸어보지도 않은 나는 서명숙 이사장과 길의 취향이 비슷하다며 흐뭇해했다.

서명숙 이사장의 경력을 확인하던 중, 이번에는 혼자 화들짝 놀랐다. 그는 오마이뉴스의 편집장으로 근무했었고, 나는 오마이뉴스의 시민기자로 ‘X의 오피스 살롱’이라는 칼럼을 연재한 적이 있었다. 이 칼럼은 난초보다는 잡초에 가까운 40대 직장인 아저씨가(나) 각종 고난에도 불구하고, 글쓰기를 통해 꿈과 희망을 찾아간다는 내용의 오피스 무협물이다. 나의 호들갑에 HJ는 혹시라도 서명숙이사장을 만나면 이래선 안 된다고 조용히 타일렀다.


마지막으로 나는 제주올레 홈페이지에서 거부할 수 없는 설렘과 마주하게 된다.

425킬로에 이르는 26개의 코스가 표기된 올레길 지도가 메인 화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지도를 보기만 했는데도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이 두근거림의 정체는 무엇일까? HJ가 나의 첫 번째 데이트 신청에 응했을 때 이후 느껴보지 못한 강도의 설렘이었다. 나는 길 (현실) 위에서가 아닌 홈페이지 (가상현실)에서 종주를 결심했다.

남이 수립한 목표에 따라 기계처럼 움직이다 스스로 목표를 세운 것이 얼마 만인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어쩌면 태어나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경우일지도 모르겠다. 결심 자체로 기쁨이 충만했다.


그러나 올레길 종주는 결심만 한다고 되는 것이 당연히 아니다. 먼저 떠오르는 두 가지 난제는 체력과 시간이었다. 그래도 결심을 했으니 1/3은 이룬 것이고, 첫발만 내디디면 반은 해낸 것이라며, 지나치게 긍정적인 마인드로 검토를 시작했다.

대략 15킬로의 한 개 코스를 하루에 걷는다고 해도 26일이 소요된다. 신혼여행도 아닌데 직장에 다니며 한 달가량의 휴가를 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올레길 종주는 팔자 좋은 중년들이나 체력 좋은 청년들만 가능한 것이 아닐까?’

갑자기 의욕이 저하되며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홈페이지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를 해결할 해법을 금세 찾아냈다.

명예의 전당 게시판에는 종주자의 소감과 사진이 있었다. 많은 이들이 몇 년에 걸쳐 완주에 성공했고, 모두 다 격정에 찬 모습으로 마치 복권에 당첨이라도 된 사람들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한 번에 다 걷지 않아도 되는구나! 나도 저렇게 웃으며 사진을 찍고 싶다’


나는 즉시 국가부흥을 위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아닌, 나의 행복을 위한 올레 종주 5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홈페이지를 통해 올래 패스포트와 가이드 북을 주문한 김에 3달 후의 비행기표까지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버킷 리스트에 뭘 자꾸 담기만 할 것이 아니라 바로 실행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2주 후, 김포에서 출발하는 제주행 비행기표를 예약했다. HJ는 너무 성급한 거 아니냐고 신중한 척했지만, 트래킹화와 배낭을 검색하고 있었다.

‘더 이상 소망 바구니 안에서 꿈이 숙성되다 못해 상하게 두지 않을 것이다.’


2주 후, 우리는 올레 16코스의 출발점에서 역사적인(?) 첫 스탬프를 찍었다. 나와 HJ가 아직 한 걸음도 떼지 않고, 마치 종주라도 한 마냥 호들갑을 떨고 있자 옆에 있던 부부가 말을 건넸다.

“부러워요. 이제 시작하시나 봐요. 우리는 오늘이 마지막 코스예요. 우리는 6년 만에 종주했어요.”

우리는 축하의 박수를 보냈고, 그 들은 우리에게 격려의 인사를 건넸다. 우리가 종주를 마칠 때쯤이면 저들과 비슷한 나이가 될 거라고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올레길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한다. 이보다 더 근사한 출발이 있을까?

코스 중간지점에서 스탬프를 찍고 정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20대 초반의 청년 둘이 다가왔다. 나는 올레 초보자답게 이것저것 궁금한 것을 물었더니, 청년들은 한 번에 종주를 할 계획으로 하루에 2코스씩 걷고 있노라 친절하게 대답을 하며 우리의 일정도 물었다. HJ는 그 들의 체력에 놀라며, 우리의 5개년 계획을 말해주었고, 청년들은 우리의 장기프로젝트에 더 놀랐다. 우리보다 늦게 도착한 청년들은 서둘러 다시 길 위에 올랐다. 올레길 위에서는 각자 다른 속도로 걷지만 도착지가 같아서인지, 모든 이가 친근하게 느껴졌다. 차를 타고 제주의 관광지를 다니면서는 얻기 어려운 경험이다.


첫 번째 일정을 무사히 마치고 나니 몸은 조금 무거워졌으나, 숨구멍이 하나 더 생긴 덕에 호흡은 소년처럼 가벼웠다. 앞으로 5년의 시간 동안 길 위에서 어떤 이들을 만나고, 어떤 추억을 쌓게 될지 소풍을 앞둔 아이처럼 내일이 기다려졌다. 쉽사리 잠들지 못하던 나는 흥분 상태인 심장을 잠재우기 위해 짧은 운문을 써보았다.


<올레 예찬>

어제는 백팩을 이고 승강장에

오늘은 배낭을 메고 올레길에 서 있다.

이보다 더 극적인 간극이 있을까?


올레는 요사스러운 내 마음의 방랑에도

항시 부동의 얼굴로 맞이한다.


올레에는 연옥빛 바당 말고도 다채로운 기쁨이 박혀있다.

오름, 곶자왈, 주상절리, 해녀 삼촌, 청보리, 유채꽃, 벚꽃들은

오감을 만족시키고, 육감을 피워 줄 것이다.


산티아고 길에 비하면 강동하지만, 더 다정하고,

하와이만큼이나 선겁지만, 더 가직이 있다.


올레는 애수의 권위자이다..

켜켜이 쌓여있는 돌담의 돌마다 처절한 슬픔이 알알이 박혀있다

올레가 순풍에 목소리를 실어 말한다.

‘잊지 마! 너를 완전히 굴복시키지 못한 고난은 바스러질 것이고,

훗날 너의 길에 굳센 돌담이 되어 줄 거야.’


궤도를 이탈한 채, 이성의 진리를 갈구하는 모든 이들이여.

심연의 빗장을 걷어 버리고 올레를 걸어보자.

해답은 늘 길 위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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