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히 늦잠을 잔 일요일 오전. 나는 평소처럼 이현우의 음악앨범을 BGM으로 선택했고, 평소와 달리 드립 커피를 내리며 갖은 고상한 척을 떨었다. 라디오를 들으며, 커피를 내리는 아날로그적인 과정을 통해, 디지털에 의해 훼손된 마음을 위로받고 있다. 드립커피세트를 얻는 과정도 가슴 한편이 훈훈했었다.
몇 년째, 고민한 하던 드립커피 도전을 만천하에 선포했다. 이 소식은 회사 앞 카페 사장님에게까지 전해졌다. 비밀이 지켜지지 않는 이유는 비밀의 최초 발설자가 자신이기 때문이다. 카페 사장님은 놀랍게도 나에게 드립 커피세트를 선물해 주었다.
“이러려고 사장님께 말한 건 아니었는데….”
나는 얼마 후, 카페에 작은 그림 하나를 선물했고, 사장님은 다시, HJ가 좋아하는 쿠키를 포장해 주셨다. 누가 서울에 정이 없다고 했는가!
나의 첫 드립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듣고 있자니 평온함이 눈처럼 내려 들었다.
삼십 분 후, 온기가 사라진 커피잔을 들고, 서재로 들어갔다. HJ는 회사를 다니며 글을 쓰는 나를 위해 방 하나를 온전히 나의 공간으로 내어주었다. 방이 3개밖에 없는 빌라에서 나는 작지만 알찬 공간을 가지게 되었고, 글을 더 열심히 쓰려고 딴에는 노력을 했다.
어제는 김훈 작가의 작업실이 있다는 호수공원으로 가서, 하루키가 좋아하는 달리기를 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일요일 아침 남은 근육통으로 오히려 글은 잘 풀리지 않았다.
‘책이나 읽자’
책상 귀퉁이에는 몇 달간 구매한 책이 탑을 이루기 일보직전이었다.
나는 잘 모르는 주식 투자 대신 책에 투자한다. 주식투자를 하다 전 재산을 날린 적이 있으며, 현재는 주식 강의로 살아가는 지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때문이다..
“개미가 주식으로 돈 버는 단 하나의 방법은 주식을 안 하는 거야”
나는 차에 대한 호기심도, 옷에 대한 욕심도, 집에 대한 욕망도 남들보다 적지만, 책에 대한 소유욕은 있었다. 그래서 신지도 않는 신발과 들지도 않는 가방을 사는 사람들의 취향을 존중하고 마음을 이해한다. 나를 위한 글쓰기를 통해 운 좋게 몇 권의 책을 내고 나니, 책을 사야 된다는 책임감 마저 생겼다.
그러나, 세상에 모든 책을 살 수 없으니, 나름의 기준을 세웠다. 주로 유명하지 않은 – 나 같은 – 작가의 책과, 작은 출판사에서 출간한 아무도 읽지 않을 것 같은 벽돌 두께의 책을 주로 산다. 무명작가와 출판산업의 엔젤투자로써 책을 구매한다..
책 더미 가운데서, 노란 표지의 책을 꺼냈다. ‘나의 사적인 예술가들’ 은 윤혜정 작가가 20년 동안 만난 세계적인 예술가들과의 인터뷰를 실은 책이었다. 나는 첫 번째 인물부터 완전히 매혹되었다.
1950년 독일에서 태어난 ‘슈타이들’은 자신의 이름을 내건 세계 최고의 아트 북 출판사를 운영 중이다. 독일의 이름도 낯선 도시 괴딩겐에 위치한 간판도 없는 출판사에서 그는 전 공정을 진두 지휘한다고 한다. 책은 오직 수작업과 100% 친환경적인 방식으로 제작된다고 한다. 또한 최고의 인쇄 퀄리티를 유지하기 위해 1억 원에 달하는 기계를 5년에 한 번씩 교체하고, 책 한 권을 만드는데 10억 원이 투입된 적도 있다고 한다.
책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평을 듣는 그의 말 또한 하나의 예술품이다.
“책은 무한 생산할 수 있는 민주적인 예술 작품이다.”
나는 ‘Steidl’ 로고가 찍힌 책을 소장하고 싶은 갈증을 느꼈다. 읽던 책을 덮고 책을 사기 위해 마우스를 클릭했다. 국내에서 슈타이들 출판사의 책을 살 수는 없었다. 다행히 한 업체에서 구매대행을 하고 있었고, 나는 책의 표지가 아름다운 슈타이들 출판사의 책 한 권을 일사천리로 주문했다. 내 생애 첫 해외구매였다. 여기까지 모든 흐름이 너무나 자연스러웠으나, 이후 모든 것이 꼬이기 시작했다. 보름이 지나서 구매대행업체에서 책 구매가 불가능하다는 문자가 왔다.
한참을 헤매다 교보문고에서 슈타이들의 책을 구매대행 하는 것을 확인하였다. 전화위복이라고 코코 샤넬의 일대기에 관한 책이 있었다. 세계최고의 아트북 출판사에서 만든 샤넬 책은 사진으로 보기에도 우아해 보였다. 샤넬 아트북이 내 작은 서재의 책장에 꽂히면 김훈 작가의 작업실 못지않은 품격이 스며들 것 같았다. 일반 책 보다 몇 배 비싼 가격이었지만, 슈타이틀의 책을 고르고, 주문하고, 기다리는 과정에서 나는 이미 내가 지불한 가격보다 더 큰 기쁨을 느꼈다.
정확한 배송 도착일을 모른 채 시간은 흘렀고, 기다림을 즐기는 동안 결혼 10주년 기념일이 다가오고 있음을 망각해 버렸다.
그날도 여느 퇴근길과 다름없이 몸은 고되었지만, 마음만은 가벼웠다. 집에 도착해 벨을 누르자 HJ가 여전한 하이 톤으로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HJ는 늘 그렇듯 환한 미소를 나를 맞아주었지만, 예민한 나는 미세하게 다른 느낌을 눈치챘다.
‘먼가 좋은 일이 있나? 나쁜 일은 아니니 다행이지만….’
가방을 내려놓기 위해 현관 옆, 서재로 들어갔다. 그런데 책상 위에 택배 박스가 놓여있는 것이다. 깔끔한 성격의 HJ는 택배 박스는 반드시 현관에서 분리하고, 내용물만 집안으로 들인다. 이것은 결혼 십 년 동안 한 번도 없었던 일이고,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매우 이례적인 조치였다.
‘이것은 메시지다.’
당황한 나는 가방도 내려놓지 못하고 자리에 선채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마침내, 결혼기념일이 사흘 뒤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 내 선물이구나.’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나는 이 위기를 어떻게 넘겨야 할지 고민하며, 일단 택배 박스 앞으로 느리게 다가갔다. 내용물을 확인한 순간 나는 다시 한번 크게 놀라고 몰았다.
내가 주문한 슈타이틀 출판사의 샤넬 북이 마침 우리 결혼기념일을 앞두고 도착한 것이다. 택배박스는 샤넬 백이 들어가기 적당한 크기였고, 운송장에는 하필이면 선명하게 CHANEL이라고 적혀있었다. 이 박스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샤넬 백을 떠올려 것이고, 결혼기념일을 앞둔 HJ는 당연히 내가 준비한 선물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박스 안에는 샤벨 백이 아니라 샤넬 책이 들어있었다. 이 날 저녁의 위기를 내가 어떻게 넘겼는지 묘사하는 일은 너무나 힘겹기에 생략하기로 하겠다.
슈타이들이 좋아하는 캐나다의 사진작가 로버트 폴리도리는 이런 말을 했다.
“디지털은 잊기 위함이고, 아날로그는 기억하기 위함이다.”
나는 아날로그 방식으로 최고의 아트 북을 만드는 슈타이들 덕분에 잊을 수 없는 기억을 가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