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보다 단음식이 귀하던 시절
작은 아버지가 명절마다 사 오던
황남빵은 성장 호르몬이었고,
그는 유일하게 기다리던 친척 어른이었다.
섬에서 근무하던 아버지가 오는 주말은
분지에 살던 우리 집 잔칫날이었다.
배를 타고 자갈치 시장에 부러 들러
양손 가득 기차에 싣고 온 남해바다.
마지막은 늘 비빔밥이었다.
야채 위에 추사체보다 아름답게 뿌려진 초고추장.
흰쌀밥을 고명 삼아 눈처럼 쏟아지던 붕장어는
삼 남매의 뼈 성장을 책임진 비타민이었다.
학력고사를 앞둔 그 해 여름
좁은 부엌에서 삶은 토종닭의
뼈를 일일이 발라내고, 먹기 좋게 살을 찢어
매콤한 양념이 된 부추로 끓인
엄마의 닭개장은 그리움이다.
첫 혹한기 훈련을 마치고 귀대한 날
밥 칸과 국 칸에 넘치게 배식된 라면은
집 밥 그 자체였다.
서울의 첫해는 유난히 허기가 졌다.
몸은 건강하고 밤은 길었고 돈은 부족했고, 라면은 청춘의 버팀목이었다.
고단함과 서러움이 뒤범벅이 날,
단골 분식점 할머니가 라면에 무심코 넣어준 한 줌의 떡
“저 그냥 라면 시켰는데요?”
할머니는 어서 먹으라고 손짓만 하셨다.
끼니와 술안주로도 호환이 용이하고
1차에도 2차에도 어울리던 순대타운은
도시 속 고향이었다.
엄마가 더 이상 김치를 담지 못하게 된 날은
상실의 날이었고,
장모님의 파김치로 돌돌 말은 삼겹살을 먹은 날은
잃어버린 세계가 복원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