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가 목적인 사람들은 불리하다고 판단되면 쉽게 포기하거나 심지어 변절한다. 그러나 승리가 목적이 아닌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불의에 항거하기 위해, 그저 마음이 불편해서 일어난 사람들은 더 단단하게 오래 버틴다. 우리는 그것을 '양심'이라고 한다. <기묘한 한국사ㅡ김재완>
경술국치 이후 채 두 달이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조선의 고관대작을 태운 마차 수 십 대가 조선 총독부로 향했다.
“오늘 무슨 일이 있나?”
“경술국치의 주역들이 귀족이 되는 날이지!”
“그게 무슨 소린가?”
“나라를 일본에 팔아넘긴 대가로 일본 천황에게 은사금과 귀족 작위를 받는다네. 해방만 되면 저것들은 다 죽은 목숨일 텐데.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총독부의 앞마당에 모인 이들은 가을 단풍처럼 한껏 달뜬 얼굴로 서로의 노고를 치하한다. 먼저 조선의 군대를 해산시키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한 정미칠적 조중응이 마차에서 내린다.
“아이고! 우리 법무대신! 참으로 고생하셨습니다. 어서 오시지요.”
조중응과 인사를 나눈 이는 을사오적 이지용이다.
“저 보다 내부대신께서 더 고생하셨지요.”
“이게 어디 한 사람의 공입니까! 우리 모두가 하나로 힘을 합친 덕이지요.”
총리대신의 자리에 오르는 이완용이 합세하니 일본의 충성스러운 개들의 울부짖음이 더욱 커진다.
“그나저나 이번에 천황폐하께서 은사금은 얼마나 내리실지 참으로 기대됩니다.”
“어허! 우리가 어디 돈을 보고 한 일이오? 어서들 들어갑시다. 총독각하를 기다리게 해서 되겠소?”
한껏 들뜬 그들을 제지하고 나선 이는 중추원 부의원장을 역임하며 이완용을 능가하는 친일파가 되는 윤원영이다.
조선의 관료였던 자들이 일제로부터 작위와 함께 받은 은사금의 현재가치 약 700억 원이 넘는다. 개인의 공로에 따라 차등 지급되었는데 이완용에 버금가는 금액을 수령한 윤원영은 특히 부동산에 관심이 많았다.
‘나라는 팔았지만 땅은 그대로이니, 이 돈으로 땅을 사들여야겠다. 땅 만한 게 없지. 암! 어디 보자. 서촌부터 사들여 볼까.’
이날 탄생한 친일귀족들은 행사를 마치고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도열했는데, 윤원영의 뒤에는 약관의 나이에 친일 귀족이 된 포천대감 이해승도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아이고, 이게 누구신가? 우리 조선왕실의 후손 포천대감 아니십니까! 젊은 나이에 큰일 하셨습니다.”
이해승은 철종의 아버지인 전계대원군의 후손이었다.
“저야 뭐. 대신들께서 차려놓은 밥상에 그저 숟가락.....”
“아닙니다. 무슨 그런 소리를 하십니까? 종친이 이렇게 딱 나서주시니. 저희도 든든합니다.”
친일 귀족이 된 이해승은 며칠 후 조상의 묘를 찾아 봉헌식을 올린다.
“조상님 덕에 제가 귀족이 됐습니다.”
한편 이완용은 요동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친일귀족의 자리에 오른 자신의 처세술에 감탄하며 인생의 분기점이 된 그날을 떠올려본다.
‘그때 내가 고집이라도 부려서 그 집에 계속 눌러앉아 있었다면. 어휴! 생각만 해도 끔찍하구나.‘
이완용은 분당 백현동의 가난한 선비 집에서 태어났다. 그가 열 살이 되자 그의 친부는 어린 장남을 불렀다. “완용아! 이호준 대감댁의 양자로 가게 되었다. 대원군마마와 가까운 분이니 너의 입신양명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소년은 타의에 의해서 부모를 갈아타게 되었는데, 이 결정은 돈과 출세를 위해 스스로의 신념마저 속이는 친일 귀족 탄생의 밑거름이 된다. 소년 이완용은 또래보다 조용한 편이었으며, 양부모는 물론이고 친부모의 3년 상을 치를 정도로 효자였다. 1882년에 과거에 합격한 이완용은 고종의 총애를 받으며 누구보다 빠르게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리고 이완용에게 첫 번째 기회이자 선택의 순간이 찾아온다.
“미국은 부강한 나라인 데다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큰 욕심을 부리지 않을 것이다. 육영공원을 설립하여 우리의 젊은 인재들이 영어를 배우게 하도록 하라.”
고종은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국의 힘을 이용하기로 했고, 국립기관인 육영공원을 설립한다. 육영공원은 명문가의 자제들과 현직 관리들 중 단 30명만 선발하였고, 29세의 이완용의 이름도 합격자 명단에 있었다.
“옳거니! 미국이 대세가 될 것이다. 하루빨리 영어를 익혀야겠다.”
2년 후인 1888년에는 이완용이 친미파로 확고한 자리를 잡게 되는 일이 일어난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 우리 공사관이 설치되었으니, 서둘러 떠날 채비를 하도록 하라.”
두 달간의 항해 끝에 미국에 도착한 이완용은 워싱턴에서 2년간 근무하며 조선 제일의 미국통으로 성장했다. 귀국 후에도 그의 초고속 승진은 이어졌고, 청년 이완용이 꿈꾸었던 인생 계획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졌다.
‘앞길이 탄탄대로구나. 어느 것 하나 걸릴 것이 없으니 살 맛이 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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