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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터박스 Jul 01. 2021

이번 생은 8남매의 둘째입니다

#1. 반포보은(反哺報恩)의 기회가 내게 올까

만약에  다음 생에 어떤 사람으로 태어날지 결정할 기회가

내게 있다면 내 아버지 어머니의 부모로 태어나고 싶습니다.



나의 아버지,

내 아버지는 아들이 귀한 집안의 장남입니다.

할아버지는 백면서생이셨던 거 같아요.

아버지는 어머니가 두 분이십니다.

아들 귀한 집에 내리 딸만 낳던 할머니께서 작은 부인을 들이셔셔 아들을 보셨고 자신의 아들로 입적시키셨대요

할아버지 육십 세에 아버지를 보셨으니 아버지 정을 느끼실 세도 없이  돌아가셨고, 초등학교 6학년 무렵 젓갈 장사로 부를 이루신 할머니께서 아버지 앞으로 재산을 꽤 남기시고 돌아가셨는데 이미 결혼하신 누님들께서 재산관리를 해주신다 하셨으나 그건 뻥이었고 아버진 누님이지만 다 큰 어른들인 분들께 재산을 모두 뺏긴 체  초등학교 6학년 무렵부터 자신과 동생들의 생계를 걱정하고 책임지셔야 했대요.

이런 이야기들을 저는 어떻게 알았냐면 제삿날 친척들이 와서 새벽쯤에 몰래 나누는 집안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들을 듣고 기억해 둔 거죠. 저는 잠귀가 밝은 편이거든요.

나중에 읍에서 아버지 둘째 누님의 자식이 운영하는 큰 빵집 앞을 지날 때면  화가 나고 했어요. 아버지 걸 빼앗긴 것 같았거든요. 조카가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상황을 보고 있노라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셨는지 아니까 아빠의 뒤태가 안쓰러울 때가 많았답니다


아버지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입학을 못했습니다. 그때부터 바다에 나가 고기 잡는 일을 도왔다고 해요.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는 집에서 배를 만드셨고

그걸로 가까운 바다  고기잡이용으로 쓰셨어요. 비록 국민학교 졸업이지만 스스로 책을 읽고 기술을 익히고 모르는 게 있으면 또 책을 읽고 익히셨어요.

햇빛 말간 날에 코 등에 땀을 흘리면서도 한껏 집중하느라 미간 살짝 찌푸리고 귀 한쪽에 연필 꼽고 배 만드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가난했지만 그때 아버지 얼굴은 행복해 보이셨거든요.


아버지를 통해 배운 건  궁금한 것을 계속 생각하고 생각을 꾸준히 이어가면 해답이 나온다는 거, 쉽게 포기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비록 지금까지 아직 빛을 보진 못했지만

음식물쓰레기를 선별 파쇄 가열 처리하는 전처리 기계를 혼자서 만드셨습니다.

가끔 서울대 공대 혹은 기계공학과 학생들을 아버지 비서로 한 달씩 1년만 같이 있게 하면 얼마나 좋을까 길을 걷다 문득문득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생각이 그들의 언어로 나오면 꽤 멋진 걸작이 나올 텐데.. 내가 아버지의 생각을 공학적 언어로 만들지 못하는 것이 이렇게 한탄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어버이날 아버지께서 오랜만에 연을 날리시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넷째가 사진으로 남겼습니다.

재작년 , 작년 내내 농장이 망하고 아버지 몸이 아프시고 너무 힘든 시기를 보내고 계시기에 사진만 봐도 눈물이 납니다.


아버지는 어떤 것에 꽂히면 쉬지 않고 생각을 하시기에 보통 사람들이 생각을 따라가기 벅차고 힘듭니다. 그리고 유한 성격이 아니라서 괴팍하게 말하시고 이야기도 잘 안 들으세요. 그게 늘 가족들의 고민인데  한편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는 독불장군적 성격은 아버지 인생에서 아버지를 지켜준 뿌리였을 것이기에 함부로 이야기 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매달 아버지를 위해 얼마간의 돈도 쓰지 못합니다

내 나이 40이 되면 아버지를 위해 매달 100만 원쯤은 드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반포보은이 쉽지 않습니다.


나의 어머니

8남매를 낳고 기르셨습니다.(전 그중 둘째입니다)

어머니를 보니 딱 제 몸 정도이네요. 9번의 출산을 하시는 동안의 일을 고작 몇 글자로 헤아릴 수 있을까요?( 어머니는  큰 아들을 잃으셨어요. 사실 저는 셋째인 거죠. 매해 절에 가서 그 나이대에 맡는 옷을 해주시고 오시는 어머니, 이제는 안 가세요. 살아 당신 옆에 있는 아들 옷도 못 사주는 형편인데 어디를 가냐면서.. 이 놈의 가난함은 어째서 좀 나아질 듯하면 다시 오고 하는 건지...)


어제 신문에 올해 출생률이 0.6이라고 합니다.

이런 기사를 보고 있노라면 좀 화가 납니다.

사회 시간에 인구계획 편이나 인구통계에 대한 부분을 배울 때 얼굴이 빨개진 적이 많았습니다. 문제의 답을 알면서 오답을 쓴 적도 있습니다. 그때 사회 책에 나온 내용이 뭔지 아시나요? 자녀를 많이 낳은 집은 가족계획을 하지 않은 무식한 사람처럼 그려지고 배운 사람들은 가족계획하에 자녀를 낳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8남매로 사는 동안 가족수에 대한 이야기로 인해 움츠려 든 적이 많습니다.  그게 고스란히 제 중고등학교 시절의 콤플렉스로 남았고요. 8남매를 낳아 기른 우리 어머니께 그 시절은 얼마나 고단하고 힘들었을까요? 누가 자식을 그렇게 많이 낳아 고생을 하래라는 무거운 이야길 스스로 이고 지고 사셨을 텐데요.


나는 그런  내 어머니의 자부심이고 싶었습니다.


내 어머니는 아들 귀한 집 장남에게 시집와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집안 어르신들의 압박을 견디셨죠. 남존여비가 여전히 남아있던 시골 씨족마을. 제삿날이면 큰어머니 댁에 떡을 가져다 드리는데 몇 집을 다녀와야 하는지.. 개는 어찌나 무섭던지..


그런 환경 속에서 자랐지만 집안에서 우리는 딸이라서 차별받은 적은 없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까지 저는 동네에서 알아주는 악동이었습니다. 2학년 무렵 빨래 개키면서 엄마랑 이야기하다가 엄마가 공부를 잘하는 딸이면 좋겠다고 해서 저는 그때부터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엄마는 마당 구석 쪽에서 그물을 정리 중이셨고 저는 마루에서 빨래를 개키턴 그날이 제 인생에 중요한 포인트가 된 거죠. 매일 쉼 없이 가족을 챙기는 엄마에게 뭐가 행복인지 물었는데 가끔 멍 때리기와 공부 잘하는 딸들 이렇게만 있으면 행복하지 하셨어요. 지금 글을 쓰는 이 와중에도 이 말의 소박함과 동시에 휴식 없는 육아의 고단함이 동시에 느껴져서 손이 살짝 떨립니다. 마음이 진정이 안되네요.


저는 그날부터 하루 연필 세 자루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새벽에 연필 세 자루를 깎아주시면 딱 깎아준 게 끝날만큼 공부하는 걸로 아버지와 약속했습니다.(사실 아버지는 제가 못할 거라 생각하셨던 듯해요. 하루 이틀이면 제 풀에 지쳐 그만하겠지 했던 거 같아요)


저는 금방 연필 세 자루가 부족해질 만큼 공부량을 늘렸고 아버지가 일하시느라 바쁜 시간이면 시멘 벽에 연필을 비벼 심이 나오게 해서 공부를 하기도 했습니다.( 무슨 6.25 동란적 이야기 갔네요. 시골에 살아서 그런 겁니다. 초등학교 때 수월성 교육받으러 가려면 아버지께서 용달차로 1시간을 태워다 주셨던 그런 시골입니다) 어머니께서 보시고  아버지께 연필깎이를 사달라고 힌트를 주셨고 또 얼마 지나서는 샤프라는 걸 사주셔셔 제 담벼락 공부는 끝났답니다.


그 당시 이달 학습이란 걸로 공부했는데 저는 일주일에 이달 학습을 다 풀었고 6학년 무렵에는 스스로 중학교 걸 다 끝냈습니다. 공부량을 늘려 반 1등 전교 1등(시골학교라 그리 대단한 건 아닙니다)을 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1등이 당연한 게 되었습니다. 내 공부의 시작은 나로 인해 엄마가 뿌듯해하시고 행복해하시는 모습을 보는 거였습니다. 저는 엄마의 자부심이고 싶었습니다. 내 전교 1등은  전교 1등 엄마라는 타이틀로 엄마의 8가지 행복 중에 하나이길 늘 바랬습니다.


요새 엄마는 밭을 엄청 열심히 경작하십니다. 농장 한 귀퉁이 돌을 다 치우시고 밭으로 일구시더니 금방 콩도 자라고 배추도 자라고 고구마도 자라더라고요. 


엄마에게 밭은 일기장 같은 겁니다. 가까운 3년 우리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장남가장 힘든 몇 해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앞뒤로 막히는지 모르겠습니다. 농장이 망하고 그걸 감당하기 위해 8남매가 십시일반 모아 돈을 해서 큰 위기를 넘기게 했는데 예상치 못한 큰 어려움이 다시 닥치고 아버지는 중병으로 아프시고...


엄마는 그 힘듬을 반대로 밭작물을 키우시면서 이겨내고 있으십니다. 밭은 정직하게 엄마에게 결과물을 주지요.

키우면 꽃이 때에 맞춰 만개해 노랗게 빨갛게 보랗게(?) 세상을 물들이고

고추 심으면 매운 고추, 아삭이 고추가 주렁주렁

작두콩을 키우면 작두콩이 그때 들인 정성만큼 자랍니다.

화려하진 않지만 노력한 만큼 수확물을 주는 밭은 엄마에게 힘듬을 이겨내고 위로하는 일기장인 셈입니다.


삶이 비록 어머니를 힘들게 하고 계획과 뜻한바대로 굴러가지 않더라도 엄마는 늘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십니다. (가끔 그 위대함에 대하여 이야기할 누군가가 필요해서 우리 집 같은 8남매 집을 찾아서 네트워크를 만들어볼까 싶기도 합니다)

올해도  모종을 사서 보냅니다. 어머니는 작지만 큰 밭에서

어김없이 부지런히 심고 가꾸시고 계십니다. 오늘도 매일의 성실함과 부지런함을 몸 소 제게 보여주시는 어머니입니다.


지난주에는 셋째가 수박과 국수를 사서 농장에 다녀왔습니다.

주말 아침 장남이 아버지와 다른 멀리 있는 동에 등에 농장에 다녀와야 해서 첫째 누나와 다섯째 누나 중에 누구 농장에 와 줄 수 없는지 톡이 올라옵니다. 어머니 혼자 계셔야 해서 걱정이 되어서 다섯째가 서둘러 가겠다고 톡이 올라옵니다.

그 사이 셋째가 지난주 다녀왔는데 어머니 살이 많이 빠져 걱정이라고 하는 톡이 올라옵니다. 저는 다섯째에게 어머니 사진을 찍어 톡방에 올려달라고 했습니다.


11시쯤 막 찐 감자를 드시고 계시는 어머니 사진이 올라옵니다. 수업 중인데 사진을 보고 울컥함이 올라와 잠시 숨 고르기를 합니다. 아무 일 없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수업을 이어갑니다. 마음이 내내 아픕니다.


이 여름 밭에서 일하시느라 까맣게 탄 얼굴과 마르신 모습을 보자니 맛있게 감자 드시는 모습인데 속이 타 들어갑니다. 일기를 너무 열심히 쓰신 모양입니다. 어머니께 따로 쉬엄쉬엄 하시라 톡을 보내야겠습니다.


만약에  다음 생에 어떤 사람으로 태어날지 결정할 기회가 내게 있다면 내 아버지 어머니의 부모로 태어나고 싶습니다.


하고 싶은 공부시켜드리고 싶고

자식들보다 자신을 위하 사는 삶을 두 분께 드리고 싶습니다.


지금보다 조금만 더 반포보은할 수 있기를 매일 다짐하고 다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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