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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의 떨림 Dec 02. 2023

<이런 날 그림책> 가면도, 민낯도 필요한 날

- L부인과의 인터뷰


  고대 그리스의 배우들은 가면을 쓰고 벗으면서 연극을 했다. 이때의 가면을 페르소나(Persona)라고 한다. 이후 페르소나는 사람을 뜻하는 person과 인격, 성격을 뜻하는 personality의 어원이 되었다. 페르소나는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하고 있는데, '페르소나 마케팅'이라는 경제용어가 있다. 페르소나와 마케팅을 합친 이 말은 기업이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고객에게 전달하고 싶은 이미지에 맞게 홍보 전략을 세우는 것을 뜻한다. 영화계에서 페르소나는 감독의 분신과도 같은 배우를 말하고, 심리학에서는 자신의 본성을 감춘 채 사회에서 요구하는 좋은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해 연기하는 사회적인 가면 즉, 외적인 인격을 의미한다.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구스타프 칼 융은 분석심리학적 관점에서 페르소나의 개념을 정리했다. 융은 인간은 천 개 이상의 페르소나를 갖고 있다고 한다.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가면 덕에 다양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고, 관계도 원만하게 유지할 수 있단다.


  페르소나는 사회적인 역할을 하는데 분명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을 자신의 본모습과 동일하게 생각하거나, 지나치게 몰두하면 문제가 생긴다. '보여주는 나'와 '진짜 '나' 사이의 간극이 클수록 부정적인 감정은 짙어지고 커진다. 『L부인과의 인터뷰』의  L부인처럼 말이다.





  제목처럼 『L부인과의 인터뷰』는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하루를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인터뷰 형식으로 이야기를 진행한다. 이번 인터뷰의 주인공은 L부인이다. 이름을 묻는 질문에 자신을 그냥 L부인으로 불러달라는 그녀는 한때 잘 나가는 사냥꾼이면서 늑대였다. 지금은 먹잇감으로 찍은 착한 신랑을 만나 토끼 같은 자식을 낳으면서 인간 세상에 적응하는 중이다. 자신의 일을 포기하고, 끝도 없이 이어지는 집안일에 시달리고, 좋아하는 여행도 가지 못하지만 그보다는 가족의 건강과 행복이 우선이다. 물론 보름달이 뜨면 여전히 힘들지만 말이다.


  L부인은 현재의 삶에 적응하고, 순응하고, 만족하는 것처럼 말한다. 그녀의 언어는 담담하고, 소박하다. 하지만 그녀의 내면을 표현하고 있는 그림은 그렇지 않다. 처음에는 잘 정돈된 집안이 뒤로 갈수록 엉망이다. 물건들은 깨지고, 분리되고, 망가져 있다. 양말은 뱀의 형상을 하더니 뱀, 다리가 많이 달린 곤충, 거미줄 집에 들어찬다. 어질러져 있는 집안보다 더 엉망으로 얽힌 건 L부인의 마음이다. 뭘 찾는지도 모른 채 뭔가를 찾고 있는 L부인은 불안하기만 하다.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집안일을 하는 L부인과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집안 살림은 그녀가 분노를 누르며 위태롭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L부인에게 집은 편안히 쉴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노동과 싸우는 장소이면서 자신의 본성을 억눌러야 하는 곳이다. 가족들이 벗어놓은 양말과 넥타이는 뱀처럼 징그럽기만 하고, 매일매일이 줄타기를 하듯 아슬아슬하다. 엄청난 수증기를 내뿜으며 끓고 있는 냄비처럼 그녀의 내면도 소란스럽고 위험하다. 거울 속에 비친 L부인과 실제의 L부인이 다르다는 것을 통해 그녀가 진짜 '나'를 감춘 채 보여주고 싶은 혹은 보여줘야만 하는 '나'를 내세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을 그냥 'L부인'으로 불러달라는 그녀가 자신의 진짜 이름을 시원하게 뱉어내며 자기 안에 있는 늑대를 드러낼 수 있을까.  


  별생각 없이 대충 보았던 앞표지를 다시 본다. L부인의 얼굴은 늑대이지만 몸은 사람이다. 커피잔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의자에 앉아 있는 L부인은 얼핏 보면 단정하고 얌전하게 보인다. 그런데 그녀의 눈썹은 올라가 있고, 입은 굳게 닫혀 있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앉아있는 몸에서 힘이 느껴진다. 발밑에 깔린 붉은색 양탄자와 귀퉁이에 작게 솟아오른 나무들이 억누르고 있는 그녀의 내면처럼 보인다. 그녀를 둘러싼 육면체의 공간은 아늑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녀를 가두고 있는 것처럼 답답하고 갑갑하다. 벽에 걸린 활은 그녀에게 여전히 사냥꾼의 본성이 남아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 세상에는 엄마란 이름의 수많은 이들이 살고 있다.
일부는 나와 같이 그 모성의 무게에 허우적대기도 하고,
사회적 잣대에 숨죽이며 살고 있을 것이다.
난 그들에게 잠시 그 무거운 짐들을 내려놓아도 된다고,
우리도 가끔은 우리만의 숲에서 뛰어다니자고 말해 주고 싶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



  자지 않는 아이를 업고서 작업을 했다는 작가는 엄마에 대한 그림책을 볼 때면 마음이 불편했다고 한다. '희생하는 엄마'에 대한 시선이 작가에게는 무척 부담스러워 도망가고 싶었단다. 엄마라는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자기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한 고민이 L부인을 탄생시켰다. 가족을 위해서는 이래야 한다는 당위와 이 정도면 괜찮다는 위안과 자신을 잃어버린 원망과 분노가 뒤섞여 혼란을 겪는 L부인은 결혼과 육아로 경력이 단절된 이 시대의 여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고 이 그림책이 엄마에게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성별이나 나이와 상관없이 가족을 위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지나친 책임감과 타인의 시선 등등의 이유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는 이들을 L부인이 대변하고 있다. 본성을 다 드러낼 수 없고, 드러내서는 안 될 때가 많으니 지금도 자신을 누르며 가면을 쓰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래도 감사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위협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우선이라며 희생을 당연히 여기고, 먹고살기 위해서는 이래 한다고 세뇌하면서 우리는 렇게 살고 있다. 무엇을 잃었는지, 무엇을 찾는지도 모른 채 헤매는 L부인은 그래서 나와 당신이기도 하다.


  드디어 찾았다며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깨뜨리고 늑대로 돌아갔지만 L부인은 오롯이 늑대로만 지는 못할 것이다. 예전처럼 잘 나가는 사냥꾼이 되었다 해도 결코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에게는 착한 남편과 사랑스러운 딸이 있으니 평범한 엄마가 되고 싶다는 L부인의 소망 역시 분명 진심이다. 그 역시 그녀가 추구하는 삶 중 하나이다. 그러니 늑대의 본성과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잘 조율해 나가길 바란다. 자신의 민낯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적절하게 가면을 쓰면서 늑대와 인간, 아내와 사냥꾼, 엄마와 또 무엇 중 하나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의 복합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좋겠다.


  그리하여  어디에선가 그녀가 자신의 진짜 이름을 당당하게 말하리라 기대한다.   


 

* L부인과의 인터뷰, 홍지혜 지음, atnoonbooks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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