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튀김

by 소심한소소

지잉-

하고 삐삐에서 진동이 울렸다.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삐삐를 들어 번호를 확인했다.


012 486

영원히 사랑해? 응?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그러니까 B선배가 지금 나를! 정말? 사랑한다고? 그런 거야?

가슴이 터질 듯 쿵쾅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고백한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이렇게 화끈하게 답을 줄 남자라고는 생각도 안 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공중전화에 동전을 넣고, 음성 메시지를 확인하기 위해 차근차근 다이얼을 눌렀다. 수화기 너머에서 B선배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무척 떨리고 긴장한 목소리로


"어.. 나.. B인데. 사실 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너는 아니고, 네 친구인데. 네가 좀 도와줬으면 좋겠어."


세상 누구에게도, 죽을 때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할 것 같은 쪽팔림과 모욕감.

잔인한 선배 나쁜 선배 (사실 좀 더 심한 욕을)를 계속 중얼거리면서도 끝까지 사람을 미워하지 못하는 난 선배가 좋아한다던 내 친구에게 삐삐를 쳤다.

"잠깐 나와봐. 중대 발표야."

그날 우리는 주엽에 있던 롯데리아에서 만났고 난 말없이 데리버거 세트 하나를 시켜 친구의 맞은편에 앉았다.

"B선배가 너 좋아한다더라. 넌 어떻게 생각해?"

"몰랐구나? 우리 사귀기로 했어. 오늘부터."

응?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청력에 문제가 생긴 걸까 잠깐 의심도 해봤지만 내가 좋아하는 선배가 내 친구와 사귀게 되었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었다.

"아, 그랬구나. 잘했어."

뭘 잘했다는 거지? 난 벌건 얼굴로 솔직하지 못한 말을 친구에게 건네고는 친구를 먼저 보냈다.


내 앞에는 나도 모르게 잘게 조각낸 감자튀김과 축 늘어진 양상추가 마요네즈와 함께 흘러나와 있는 데리버거가 반쯤 남아 있었다. 그날 난 내 인생이 조각난 감자튀김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는 더 이상 아무도 먹지 않는 산산조각 난 감자튀김. 심지어 자존심 상하게 싸구려 햄버거의 사이드 메뉴라니. 잘게 조각난 감자튀김을 보며 롯데리아 구석 자리에 앉아 날이 저물도록 꺼이꺼이 울었다. 울다가 울다가 또 울다가 남은 감자튀김과 데리버거 반쪽을 쓰레기통으로 처넣으면서 다짐했다.

난 이제 죽는 날까지 감자튀김을 먹지 않으리.


그로부터 석 달쯤 뒤 친구와 선배는 100일 기념 동전을 받으러 다니던 중 크게 다투고 보기 좋게 헤어졌다. 둘의 헤어짐이 내심 고소해서 그즈음 새로 사귄 남자 친구의 손을 잡고 롯데리아에 가서 감자튀김을 두 개 시켜 단숨에 먹어 치웠다. 그날따라 감자튀김이 그렇게 고소하고 바삭한 게 세상 둘도 없는 맛이었다.



감자튀김을 먹을 때마다 내 앞을 지나가던 둘을 가자미 눈으로 째려보던 창피한 모습의 내가 떠오른다.

둘은 지금쯤 어디에서 누구를 사랑하며 살고 있을까.

그날 영문도 모른 채 롯데리아로 끌려 들어가 감자튀김을 우걱우걱 먹어대던 내 얼굴을 바라보던,

입에 묻은 케첩을 닦아주며 갸우뚱거리던 너는 지금은 누구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까.

그 이후로 나는 누군가의 연락을 그토록 애타게 기다려 본 적이 있었던가.

나 자신에게만은 솔직했다 싶을 정도로 그렇게 속 시원하게 울어본 적은 있었던가.

감자튀김 두 개를 먹는 정도로 밖에 표현하지 못한 어설펐던 내 마음은 지금 어디에 가 있을까.

얼굴이 퉁퉁 붓도록 울고도 그곳에 다시 가서 감자튀김을 먹어대던 그날의 나는 지금 어디에 가 있을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시간이 많은 것을 변하게 했다.

나이를 먹었다는 석연찮은 이유로 그날의 내가 어디쯤 가 있는지 찾을 수 없고,

그렇게 고소하던 감자튀김도 이젠 그 맛이 나지 않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래도 오늘은,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사랑하며 살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 끝에 작게 소리 내어 말해본다.


"여전히 넌 못된 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