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킨 한 조각

by 소심한소소

어릴 적,

추석이나 설 같은 명절에 강원도 할머니 댁으로 가던 길은 정말이지 신이 났다. 설레어 며칠 동안 잠을 설치기도 하고, 달력에 표시를 해 가며 강원도에 가는 날을 기다렸다.


그림을 잘 그리던 고모들은 내가 져간 노트에 예쁜 그림을 그려 주곤 했는데 방학이 끝나고 나서 친구들에게 그것들을 보여주면 어깨가 한껏 으쓱했다.

할머니가 새우젓을 넣고 볶아주던 호박볶음과 우유와 요구르트를 적당한 비율로 혼합한 할머니표 우유도 정말 맛이 좋았다.

할머니 방에 있던 작은 창으로 내다보이던 얕은 언덕에는 옥수수가 주욱- 심어져 있고 여지없이 할아버지가 계셨다. 탄광촌이라 방안에는 탄가루가 쌓였지만 그 작은 창으로 보이던 풍경은 그림같이 고왔다.

가끔은 옥수숫대를 꺾어다가 입에 물려주셨는데 들큼한 맛이 생경하면서도 친숙했다.

엄마 아빠와 지낼 때는 느끼지 못하던, 조금 불편하면서도 뭉근한 따듯함이 좋았다.


하지만 강원도에 가는 날을 그토록 기다린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기차를 타기 전 청량리역에 있던 롯데리아에서 먹던

치킨 한 조각과 밀크셰이크.


처음 롯데리아에 갔던 날의 황홀경을 잊을 수가 없다. 프라이드치킨? 밀크셰이크? 햄버거? 두 눈이 휘둥그레지던 메뉴 이름에 주눅이 들어 삐죽거리는데 아빠가 저벅저벅 직원에게 걸어가더니 당당한 목소리로 메뉴 몇 개를 골라 주문을 했다.

그리고는 세상에 태어나 처음 보는 음식들이 아빠 손에 들려 내게로 왔다.


"아빠 밀크셰이크에는 후추를 뿌려 먹나봐. 너무너무 맛있어!!"

아빠도 밀크셰이크 위에 뿌려진 검은 가루의 정체를 모르는지

"그런가. 이렇게 후추를 살짝 뿌리니까 맛있다" 하셨다.

훗날 친구에게 밀크셰이크에 뿌려진 후추를 자랑하다가 그것이 바닐라빈임을 알고 얼굴이 벌게지기도 했지만 그건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태어나 처음 먹어본 음식이 심지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맛있는 것이 핵심이었다. 겉에 붙은 튀김옷은 바삭바삭하고 속에 숨어 있는 살은 육즙이 흐를 정도로 촉촉했다. 아빠가 퇴근길에 가끔 사 들고 오던 종이 가방에 들어 있는 닭튀김이나 엄마가 정성스럽게 튀겨주던 눅진한 닭과는 차원이 달랐다.

또 간간이 마셔주는 밀크셰이크와는 두말할 것도 없이 대단한 궁합이었다. 며칠 동안 그 맛이 입에 맴돌고 잊히지가 않았다.

할머니 댁에 매일같이 내려가고 싶었다.


맏이인 나는 아무리 하고 싶고 갖고 싶어도 조르는 법이 없었다. 롯데리아 치킨이라면 매일도 먹겠지만

단 한 번도 사달라고 입 밖에 낸 적이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빠는 내 마음을 어찌 그리 잘 아는지

기차를 탈 일이 생기면 조금 서둘러 집에서 출발해 롯데리아에 들렀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치킨 한 조각과 밀크셰이크에는 가벼운 주머니를 열심하게 뒤적여 새끼에게 맛있는 것을 먹이려던 아빠의 얼굴이 있었다. 맞은편에 앉아 어린애같이 말갛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던 아버지의 얼굴.

어머님은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던 것 처럼 우리 아빠도 나를 그렇게 사랑하는구나 생각했었다. 철부지 딸래미의 입에 들어가는 걸 보면 안 먹어도 배가 부른 그런 아빠였구나 생각했었다.


그런데 얼마 전

'마흔이 넘어도 치킨을 먹을 때는 아빠 얼굴이 떠오른다'라고 얘기했더니 아빠는 황당하다는 듯 '그냥 내가 맛있어서 먹으러 갔다. 그게 그땐 그렇게 맛이 좋드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래, 아빠도 치킨은 맛있을 수 있는 건데- 마흔이 넘어도 여전히 어린 자식이 부모를 헤아리는 마음은 얕고도 얕다.

부모가 되어도 모를 것 같은 부모의 마음인데 아직 부모가 되지 못해서 더 모르겠다. 아빠도 취향이 있고 자식에게 양보하고 싶지 않은 순간도 있었으리라는 것을 미처 짐작하지 못했다. 나를 위해 계속적인 희생만 했을 것이라는 기대와 오해로 도리어 그것들을 강요하며 살지 않았을까.


아무튼 난 백숙은 안 먹어도 프라이드치킨은 먹는다.

어린 딸의 엉뚱하지만 풀고 싶지는 않은 오해로 인하여.




매거진의 이전글돈가스 덮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