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버건디 무키 채널 오프닝 멘트> 리뷰
'버건디 무키 채널 오프닝 멘트'라는 제목을 보자마자 어, 뭔가 힙할 것 같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다시피 포스터도 힙하다. 대형 유튜브 채널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갈등 -이라는 연극판에서 잘 보기 힘든, 그러나 동시대적이고 내 나이대가 공감하기 좋은 소재도 좋았는데 게다가 레오타드 안나수이의 박찬규 작가? 대학로극장 쿼드? 망설일 이유가 있을까. 당장 예매했다.
그리하여 2023년 4월 22일 토요일에 관람한 공연
연출 강훈구
극작 박찬규
배우 이봄(재희 역), 김민주(윤영 역), 류세일(주원 역), 김지훈(슈랭 역), 이세준(빅쿤 역), 김보경(혜정 역)
장소 서울문화재단 대학로극장 쿼드 (https://www.quad.or.kr/product/performance/1134)
줄거리(스포 있음)
46만 구독자를 가진 유튜브 채널 '버건디 무키'. 버건디 무키는 간판 유튜버인 재희, 서브 유튜버인 슈랭과 빅쿤 그리고 채널의 총책임자이자 재희의 남자친구인 주원이 함께 운영한다.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갔다가 돌아온 원년 멤버 윤영은 전처럼 자유롭게, 날 것 그대로의 방송을 만들고 싶지만 이제 수많은 구독자와 협찬사, 매니지먼트 회사까지 얽힌 버건디 무키는 전과는 다르게 운영된다. 주원은 채널의 성공과 계약 조건을 이유로 구성원들의 사생활이나 콘텐츠 내용, 업로드 주기 등 모든 것을 통제하고, 여기에 불만을 가진 멤버들이 생긴다. 한편 채널의 또 다른 원년멤버 혜정은 벗방을 했다는 이유로 퇴출된 상태다. 혜정은 자신의 아이디어로 만들어진 채널에서 한 번의 실수로 자신을 쫓아낸 재희와 주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재희의 가족사가 담긴 영상으로 채널의 주도권을 다시 가져오고 싶어 한다.
(본 리뷰에는 스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굉장히 재미있게 잘 봤다.
사실 내용적으로는 아주 새롭거나 신선하지는 않았다. 유튜브를 소재로 이야기를 만든다면 가장 쉽게 생각할만한 내용 - 채널 속 나와 채널 밖 나 사이의 괴리감, 협찬사의 요구와 구독자가 보고 싶어 하는 것들을 만족시키면서 동시에 '진짜 나'를 얼마나 보여줄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 - 이 주요 내용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고민을 20대가 가지는 보편적인 고민과 잘 엮어냈다고 생각한다. 극 중 '너 이제 스물여섯 살이야 (스무 살이 아니고)'라는 대사가 두 번인가 나온다. 20대 중후반. 20살처럼 아무것도 몰라도 되는 나이는 아니고, 회사에든 어디에든 나를 어필하고 팔아야 할 것 같은데 마땅히 팔 지식이나 전문성, 경험이 있기에는 아직 어린 애매한 나이대. 팔 수 있는 건 내 몸뚱이, 즉 내 노동력이거나 혹은 나의 젊음, 젊은 에너지, 취향 정도밖에 없는 상태에서 버건디 무키의 유튜버들은 후자를 팔기로 결정한 거다. 물류센터나 서빙 알바를 하면서 노동력을 파는 것보다는 카메라 앞에서 내 사생활과 나의 행복한 모습을 파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팔리지 않는 우울한 가정사는 숨겨야 할 것이 된다. 그런 상황에서 어떤 캐릭터는 진짜 나를 못 보여줄 바에는 노동력을 팔겠다고 말하며 뛰쳐나오고, 누군가는 나를 숨겨가면서도 여전히 SNS에 게시물을 올리며 재기의 기회를 노린다. 각자의 선택은 다르지만 그 모습이 취업 시장에 던져진 보편적인 20대의 모습을 닮아있기 때문에 이 극이 그냥 유튜버들의 이야기 이상이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26살에 빵집 아르바이트하며 노동력 팔아서 돈 벌고 있는 나도... 무척이나 공감이 됐다지...
그리고 유튜버들의 이야기라는 내용적인 측면과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형식적인 측면이 잘 맞아떨어지는 것도 좋았다. 이제까지 영상 등 미디어 기술을 활용한 연극을 볼 때는 그게 오히려 너무 거슬리거나, 보기에 썩 나쁘지 않았더라도 굳이 미디어를 활용하기 위해서 활용했다는 느낌을 주거나, 베리어프리를 목적으로 사용했는데 이왕 쓰는 김에 조금 연출도 해본 것처럼 보이는 등 내 성에 차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까 미디어가 '굳이' '덧붙여진' 느낌이었다면 <버건디 무키 채널 오프닝 멘트>에서는 미디어가 극의 완성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했다. 이런 식의 연극에서의 영상 사용이 군더더기처럼 느껴지지 않은 공연은 거의 처음이었던 것 같다.
물론 대단한 기술이 사용된 건 아니다. 공연 중 등장인물이 채널에 올릴 영상을 촬영할 때, 카메라 속 영상을 실시간으로 무대 화면에 띄우는 기술이 사용됐다. 첫 줄 맨 끝에서 공연을 봤기 때문에 공연 중 카메라 속에 슬쩍씩 담기는 나를 발견하는 재미도 있었다ㅎ! 아무튼, 아무래도 영상을 찍는 사람들에 대한 연극이니까 영상을 실제로 찍고 그걸 보여주는 게 내용상 이상하지 않았고, 오히려 지금 저 카메라 속에 등장인물이 얼마나 클로즈업돼서 찍히는지, 등장인물의 무엇이 카메라에 노출되는지를 관객이 다 확인할 수 있어서 인물이 얼마나 압박감을 느끼고 있을지가 더 잘 보였다. 등장인물이 부담감을 느끼는 상황일수록 카메라도 더 클로즈업해서 더 가깝게 인물을 촬영했는데 카메라가 주는 압박감이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렇게 카메라가 사용되다 보니 연극이 어쩔 수 없이 가지게 되는 약점, 관객의 위치나 좌석 배치에 따라 배우의 연기가 안 보일 때가 있다는 약점이 잘 보완되었다. 음, 가끔 연극에서 등장인물이 화를 내거나 욕을 할 때 굉장히.. 어색해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건 배우가 연기를 못해서 일 때도 있지만, 멀리 있는 관객에게도 감정이 잘 보여야 해서 일부러 과장을 한 것이거나, 혹은 배우는 차곡차곡 감정을 쌓아서 터트린 건데 관객의 눈에는 표정이나 디테일한 부분이 잘 안 보이니까 급발진처럼 느껴져서 등의 이유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버건디 무키 채널 오프닝 멘트>에서는 카메라가 그걸 보완해 주니까 눈만 감았다 떠도 인물이 무슨 감정인지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래서였는지 극 중 욕도 많이 나오고 엄청 싸우는데도 크게 어색하지 않았다. 물론 이건 배우의 연기와 희곡 자체가 좋았기 때문도 있겠지만.. 아무튼.
그리고 이렇게 카메라가 보완을 해주니까 관객석도 무대를 한 방향으로 바라보는 식이 아니라 무대를 ㄷ자로 둘러싸는 형식으로 만들 수 있었다. 내가 배우의 뒷모습만 보게 되는 시간이 꽤 길었지만, 필요할 때는 화면을 통해 앞모습을 보여주니까 크게 답답하지 않았다.
이렇게 전반적으로는 아주 잘 봤지만, 아쉬운 부분도 있다.
일단은 주원이 너무 일방적인 악역으로 나오는 것 같다. 주원은 채널이 잘 돼야 하니까 - 를 이유로 구성원들의 영상 촬영을 통제한다. 새로운 기획을 통으로 날려버리기도 하고, 사과문 찍기 싫다는데 어떻게든 찍게 만들고, 사과문 내용도 자기가 마음대로 수정하고 등등. 진짜 등장인물들의 말처럼 독재자처럼 보인다.
근데 주원의 입장도 이해하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입장이다. 여기저기 회사랑 계약 다 맺어 놨는데 갑자기 구성원이 마음대로 콘텐츠를 바꾸면 중단 다리 역할을 하는 주원 입장에서는 난감할 수 있고, 죽어가는 채널을 어떻게든 살리려면 비록 감성팔이처럼 느껴지더라도 사과를 해야 하는 게 맞으니까. 요즘 시대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선택을 하는 인물인데, 그런 주원이 너무 구성원들을 찍어 누르니까 그냥 이해하기 싫어진다. 너무 그냥 전형적인 악역. 중간에 긴 독백이 한 번 나오지만 그걸로는 설득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주원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대사를 좀 더 넣거나, 혹은 구성원들을 차분하게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장면이 하나라도 나왔다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 부분이 없어서 인물이 좀 평평하고 매력이 없어진 느낌이다.
그리고 다재희가 재훈이 사건에 대한 감상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부분. 여긴 대형스포가 될 수 있다. 결국 채널 '버건디 무키'는 영상 하나가 공개되면서 망하게 된다. 물에 빠져 죽을 위기인 동생 재훈이를 구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서서 보고만 있는 재희의 영상이 공개된 거다. 영상이 공개된 후로 재희는 재훈이를 죽이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는 내용의 사과 영상을 찍어야 했는데, 그 영상을 찍기 전에 재희가 혼잣말로 독백을 한다.
'솔직한 마음을 말하면 된다고... 내 솔직한 마음...'이라고 시작하는 대사를 잘 들어보면 결국 재희에게는 재훈이를 죽게 내버려 두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재훈이를 구하면 같이 어렵게 살던, 그래서 불행했던 과거로 돌아가게 될까 봐. 그리고 그게 이해가 된다. 이제 채널은 겨우 조금 성장할 낌새가 보이는데, 이제야 불행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은데, 재훈이는 자폐를 가지고 있고 계속 혼자서 날 찾아 그리고 내가 없으면 내 고등학생 때 친구들을 찾아서 돌아다니고... 아무튼 결국 재훈이가 방해라고 생각한 건 맞다. 근데 그 말을 직접적으로 안 하고 (대사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나는 그냥... 행복하게 누워있고 싶었어...'같은 추상적인 말로 포장해 버린다. 거기서 이를테면 '죽어도 상관없겠다고 생각했어, 아니 어쩌면 그걸 바라고 있었는지도 몰라'정도로 직설적으로 말해도 재희가 악인처럼 느껴지지 않았을 것 같은데. 재희를 너무... 선한 역할로 남겨놓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솔직하지 않게 느껴졌다.
리뷰는 여기까지. 너무 무겁지도 너무 가볍지도 않은 적당한 작품이었고 다 떠나서 일단 재미있었다. 그리고 혜정이라는 캐릭터가 아주 매력 있었음!
공놀이클럽이라는 영어덜트 연극창작집단의 공연이었는데 나도 20대 중후반에 속한 관객으로서 많이 공감이 됐다. 앞으로도 공놀이클럽의 연극은 꾸준히 보고 다녀야지. 그럼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