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의 음주 문화
부재중 전화 23통.
아침에 휴대폰에 찍힌 부재중 전화를 확인한 순간, 벌떡 일어났다. 난 그날 오전 10시에 특공(특별공연)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휴대폰 시간은 11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그야말로 대참사였다.
'아!! 어떡하지? 큰일났네!!??'
다급한 마음으로 전화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나 대신 다른 배우가 있어 공연은 펑크 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공연을 쨀 수 있지!!!'
나에게 큰 실망을 했다. 난 도대체 왜 공연을 가지 못하고 늦잠을 잤던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전날 초저녁부터 술을 진탕 마시고 뻗어버렸기 때문이다. 인생의 크나큰 오점이었다.
그날 바로, 대표님을 찾아가 석고대죄하고 앞으로 있을 특공을 내가 맡아서 하겠다고 약속하고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참고로, 대표님은 특공 배우를 구하기 힘들어 골머리를 앓고 계셨다)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 뒤론 다신 이런 일을 발생시키지 않으려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았다.
그렇다면 이 사건 이후로 난 술을 마시지 않았을까? 대답은 '전혀 아니다'이다. 그 뒤로도 줄기차게 술을 마시러 다녔다. 대신 공연 펑크 내는 일은 없도록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아무튼 나처럼 술 때문에 무책임한 사람이 되고 싶다면 나와 같은 행동 패턴을 열심히 하면 된다.
술 마시는 행위를 변호하고 싶지도 않고 권하고 싶지도 않다.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생활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는 음주에 관대하고 활성화가 되어 있는 문화적 특성을 지녔다. 이런 문화가 술을 좋아하는 입장임에도 좋을 때도 있고 좋지 않을 때도 있다.
최근의 사회 패턴을 보면 회식 자리도 줄어들고 더는 90년대, 2000년대처럼 술을 권하는 사회도 아니다. 시대가 변했으니, 그에 맞는 문화가 새롭게 형성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국 사회가 점점 '집단주의·관계주의'에서 '개인주의'적 성향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도 시대에 맞는 현상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배우라는 아니 영화나 연극, 뮤지컬 등의 문화예술 분야는 일반 직장인과는 다른 조직적 특성이 있다.
현대의 일반 직장인은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자신이 맡은 업무에만 최선을 다하고 적절한 인간관계만 유지하면 된다. 대체로 말이다. 그러나 배우라는 직업은 그렇지 않다. 연극으로 예를 들면, 다른 배우와의 호흡이 정말 중요하다. 언어와 신체 접촉, 감정이 오고 가는 작업이기에 다른 배우의 말과 행동, 호흡, 눈빛 등의 정서적 교류가 계속해서 이뤄져야 한다.
그러다 보니 비예술인보다 개개인의 관계가 더 깊어져야 하고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쉽게 말해, 긴밀한 인간관계가 필요하다는 말이다.(한 작품이 끝나고 안 보더라도 말이다) 긴밀하고 친숙한 인간관계를 위해선 끊임없이 소통해야 하고 더불어 친목 차원에서라도 술자리가 마련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왜 그런지 몰라도 술을 좋아하는 예술인이 참 많다) 또, 배우가 아닌 기술팀(음향·조명·무대 팀 등)과의 호흡도 마찬가지다.
연극을 예로 들었지만, 영화든 드라마든 뮤지컬이든 크게 다르지 않다.
문화가 이러니 술을 꼭 마셔야 하고 술자리에 반드시 참석하라는 건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여타 다른 직업과는 다른 문화가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을 뿐이다. 배우는 9시에 출근해서 18시에 퇴근하는 직업이 아닐뿐더러 혼자만 잘한다고 다 되는 직군도 아니다.
그러니 이 점을 명심하고 자신이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를 꼭 파악하길 바란다. 이런 부분에서 적응하기 힘들어 그만두는 배우를 간혹 봤기에 하는 말이다. 당신이 만약 술을 좋아하고 사람을 좋아한다면 상관없는 일이다. 하지만 술도 안 좋아하고(못하고) 인간관계에 힘겨워한다면 여러 시험에 들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이를 위해 억지로 술을 마셔보거나 술 마시는 연습을 할 필요는 절대 없다. 단, 자신이 인간관계가 서툴다 싶으면 이 부분에 대해서 충분히 고민하고 개선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술을 싫어하고 못 한다면 술에 대한 개인적 의견을 확실히 인식시킨 다음 술자리에 참석해 관계를 형성하면 된다. 괜히 관계를 위해 못하는 술 마시며 자기 몸을 망치지 않길 바란다.
내 주변 배우 중에도 술을 전혀 못 하지만, 매번 술자리에 참석해 서로 웃고 떠들며 재미나게 놀고 연:기, 작품 등에 대해서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꽤 있다. 그러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난 그저 이 바닥의 문화를 최대한 알려주고 싶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자 하는 건. '배우는 몸이 무기이고 재산이다.'라는 것이다. 난 그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19도 알콜을 아주 줄기차게 몸속에 끼얹었다. 거짓말 조금 보태 한 달이 30일이라면 31일 동안 술을 마셨다.
아. 왜 그랬을까...?..
아무튼 그 덕분에 온갖 위장 장애와 컨디션 저하로 삶의 패턴을 무너뜨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상황이 이러니 공연이나 촬영을 제대로 했겠는가?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여기에 플러스알파로 담배까지 줄기차게 태웠으니 더 말 안 해도 내 몸 상태를 알 것이다. 혈기 왕성한 20~30대 중반까진 괜찮았는데 30대 후반부터는 말도 아니었다.
음악가가 자신의 악기를 소중히 다루고 관리해야 좋은 연주와 소리를 들려줄 수 있듯이 배우는 목소리와 신체라는 악기를 소중히 다뤄야 좋은 연:기를 보여줄 수 있다. 자신의 악기를 소중히 다루길 바란다.
'아. 내 몸을 소중히 다뤘더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