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피티(graffiti)’는 락카나 스프레이 등을 이용해 공공장소나 벽에 그림, 글자 등을 새겨넣는 행위를 뜻합니다. 이것은 공공장소이든 사적인 건물의 외벽이든 누군가가 허락을 받지 않고 벽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보니 일종의 반달리즘(vandalism)으로 여겨집니다. 다시 말해, 일종의 범죄, 불법적인 행위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러한 반체제적 행위도 예술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이제는 전세계의 주요 미술관에서 그래피티, 스트릿 아트(street art)를 다루는 전시회를 열기도 하며, 주요 미술 경매회사에서 그래피티 작품을 판매하기도 합니다. 미술계에서 다뤄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래피티가 분명 불법적인 행위지만, 작품의 내용이 가진 예술성을 인정 받았다는 근거가 될 수 있을까요? 이러한 그래피티의 역사를 다룬 영화가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2010년 뱅크시(Banksy)가 감독하여 제작한 영화 <선물가게를 지나야 출구(Exit Through the Gift Shop)>입니다.
뱅크시는 영국의 그래피티 아티스트로,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작업하고 있으며, 아무도 그의 개인적인 신상정보에 대해서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그의 웹사이트 https://www.banksy.co.uk/ 에 들어가면 기록된 작품 사진을 확인할 수 있어요. 그의 작품은 자본주의 비판, 반전, 동성애, 권력의 문제 등 여러 논쟁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또한 직관적이고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으면서도, 해당 이미지의 맥락과 어우러지는 장소나 벽의 선택에서도 탁월함을 보여줍니다. 뱅크시는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할 때 주로 사용하는 스텐실(Stencil)기법을 사용하는데, 스텐실이란 원하는 모양을 그린다음 두꺼운 종이나 필름에 옮겨 구멍을 뚫고 물감이나 스프레이 등을 도포해 그림을 복사해내는 방식입니다. 이 기법을 활용해 빠른 속도로 원하는 장소에 그림을 그리며, 뛰어난 묘사력과 완성도를 보여줍니다.
그가 감독한 영화 <선물 가게를 지나야 출구>는 그래피티 아티스트가 작업하는 과정과 인터뷰를 담은 다큐멘터리입니다. 보통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보고 나오려고 하다보면, 출구로 가기 위해서는 꼭 아트숍을 통해야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술과 자본의 관계에 관해 비판적 시선을 담은 그의 태도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제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영화는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는 프랑스인 티에리 구에타(Thierry Guetta)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다뤄지는 그의 서사는 한편의 블랙 코미디와 같이 진행됩니다. 개인적 연유로 어딜가든 비디오 카메라를 들고 기록에 집착하는 티에리 구에타는, 프랑스에 가족 방문차 들렀다가 스페이스 인베이더(Space Invader)라는 이름으로 활동 중인 그래피티 아티스트 사촌을 만나게 됩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이후 여러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을 만날 수 있게 되죠. 셰퍼드 페리(Shepherd Fairy), 세이저(Seizer), 론 잉글리쉬(Ron English), 스운(Swoon), 보프(Borf)등 가능한 많은 작가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의 작업 과정을 모두 영상으로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끝판왕’이라고 불리는 뱅크시까지 만나게 되죠. 두려움 없이 망도 봐주고, 밤새 적극적인 어시스턴트 역할을 자처하며 그의 작업을 도왔습니다. 보통은 작업이 마무리되면 그래피티 아티스트는 빨리 도망치기 바쁜데, 티에리 구에타 덕분에 작품을 마주한 사람들의 반응을 영상으로 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던 와중 뱅크시는 로스앤젤레스에서 <Barely Legal>(2006)이라는 제목으로 첫 전시회를 열게 되었어요. 전시는 성공적이었고, 수많은 관객, 컬렉터들이 몰려들었답니다. 불법적인 행위가 하루 아침에 돈이 되는 상품이 되어버리게 된 것이지요. 뱅크시는 티에리 구에타에게 그간 찍어둔 영상들을 편집해서 영화로 만들 것을 권유하고, 6개월 뒤 <Life Remote Control>로 완성되지만, 그것은 마치 집중력 장애를 가진 사람이 만든 90여 분의 끔찍한 트레일러였다고 회고합니다. 영화제작자로서의 능력이 없음을 돌려 전달하기 위해 뱅크시는 티에리 구에타에게 직접 그래피티 아티스트가 되어보기를 권유합니다.
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티에리 구에타는 모든 예술은 일종의 세뇌라는 믿음으로, Mr. Brainwash 라는 이름을 사용해 작업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는 거대한 스튜디오를 만들고, 수많은 직원들을 채용하였으며, 폐공장을 빌리고, 수백 여점의 작품을 제작하기에 이르릅니다. 동료 작가들의 추천사를 받아 전시회 홍보에도 매진합니다. Mr.Brainwash의 전시회 <Life is Beautiful>(2008)에는 엄청나게 많은 관객이 몰려들었고, 작품 판매 수익 역시 백만달러에 육박하는 대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영화 말미에 감독인 뱅크시는 티에리의 성공이 의미하는 것은 "예술이 사기라는 것일까?" "정말 예술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인가?" 와 같은 질문을 던지며 영화를 마무리합니다.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높은 가격이 매겨지고 또 유통되는 상황, 불법적인 것이라 여겨졌던 스트릿 아트, 그래피티가 미술계라는 제도권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 경유 등 뱅크시는 기존 제도의 모순에 대해 직설적으로 비판하는 목소리를 냅니다. 또한 전 세계 수많은 미술관에서 열린 그의 전시는 실제로 그와의 상의 없이 개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네요. 더 나아가 그는 2015년에 팔레스타인 베들레헴에 월드오프 호텔(Walled Off Hotel)을 지어서 내부를 그의 방식대로 디자인했고요, 2018년 10월에는 자신의 작품 중 하나인 <풍선을 든 소녀>가 104만 파운드(한화 15억원) 로 경매에서 낙찰되자 프레임 밑에 설치해 둔 분쇄기를 가동시켜 그림의 절반을 분쇄하는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습니다. 낙찰받은 고객은 “분쇄 순간 매우 충격을 받았지만, 미술사에 남는 작품을 소유할 수 있게 됐다”며 작품을 최종 구매하였습니다.
미술관이나 갤러리 내에서 고상하게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불법적인 영역에서의 긴장감, 자유로움을 표방했던 스트리트 아트, 그래피티인데, 그것이 역설적으로 그들이 비판하고자 했던 미술 작품과 같이 경매를 통해 값비싼 가격에 판매되는 모습이 실소를 자아내게 합니다. 무엇보다 단순히 그래피티 작가들의 작업물을 기록하는 데 열중했던 티에리 구에타가 많은 돈을 투자하고 또 홍보해서 작가로서의 입지를 만들어나가는 것을 보면, 무엇이 예술인지, 혹은 누가 예술가인지 정의하는 것이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큰 미술관에서 전시를 보고 나올 때면, 출구로 향하는 길에 꼭 아트숍이 있었던 것이 떠오르실 겁니다. 해당 전시의 도록이나, 작은 기념품, 엽서 등 작품과 전시와 연계된 아트 상품들을 구입하도록 하는 동선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예술은 정신의 영역에서의 활동이지만, 그것을 볼 수 있도록 전시로 만들고 또 기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원동력이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예술의 현 주소에 관해 고찰해보는 기회로, 이 영화, <선물가게를 지나야 출구>를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