겹겹이 쌓인 텍스트는 어느새 머리 위까지 가득 차올라 출렁거리고 텍스트에 잠긴 나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 속에 놓인다. 이따금 선명하게 귀에 박히는 단어와 문장들에 놀라며 그제야 소리 없는 짧은 숨을 뱉어낸다. 그리고 다시 텍스트에 잠기기, 반복.
드물지만 이렇게 온전히 몰입하게 만드는 극이 있다.
연극은 퍼즐 맞추기다. 불친절하게 날아드는 단어와 문장들에 집중해서 그것들을 배열해 나가다 보면 대략의 그림이 보이기 시작하는 <!> 의 순간이 있다. 그렇게 계속 텍스트 속 단서를 모으다 드디어 선명한 그림이 보이는 순간의 <!!>, 그리고 비로소 그림이 완성되는 순간 <!!!> 의 짜릿함. 마치 퍼즐 경연대회에서 1등이라도 한 마냥 의기양양해지는 순간의 우쭐함은 나만의 비밀스러운 덤이다.
그래서일까. 와다다다 쏟아내는 불친절한 텍스트에 치이는 극을 나는 조금 더 선호하는 편이다. 1,000피스짜리 퍼즐보다 10,000피스짜리 퍼즐이 머리는 좀 더 아파도 더 큰 성취감이 있는 법이니까.
연극 비평가는 오랜만에 만난 만 피스짜리 퍼즐이었다.
스카르파의 극 중 극, 스승과 제자의 권투시합. 가르친 자와 가르침을 받은 자의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대결은 네 권의 고전 명작을 던져 만든 링에서 시작된다. 스카르파의 대사로만 전해지는 이 고독한 대결은 온갖 상상력을 맹렬히 자극하며 눈앞에서 권투시합을 벌이는 두 사람을 소환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몰아치는 스카르파의 원맨쇼에 압도당하며 여기서 첫 번째 <!>
<!> 이 대결은 볼로디아와 스카르파의 대결이다.
극과 비평으로 은밀히 전해지던 서로의 욕망은 볼로니아와 스카르파의 실제 만남으로 불이 붙는다. 서로의 파괴적 욕망과 실망에의 성토. 누가 실패했는가에 대한 첨예한 논쟁. 두 사람이 극과 비평으로 주고받았던 잽과 훅은 극 중 극 에릭과 타우베스 권투시합으로 재현되고, 그 대결은 볼로디아와 스카르파의 논쟁으로 현실에 재소환된다.
연극을 통해 진실을 이야기해주길 바랐던 볼로디아를 위한 스카르파의 비장의 한 수였던 제3의 인물을 볼로디아가 가짜라고 규정하는 순간 두 사람의 갈등은 극에 달한다.
자신의 선생님이 이번만큼은 칭찬을 해주길 바랐을 거다. 그가 그토록 오랜 시간 요구했던 진짜 현실을 극으로 만들었으니. 그런데 그걸 알아봐 주지 못하는 볼로디아에게 느낀 스카르파의 배신감과 분노를 담은 마지막 일격은 그 꼿꼿하던 볼로디아를 휘청이게 한다.
<!!> 스카르파의 방문은 에릭이 타우베스에게 날린 마지막 한 방이었다.
진실을 보는 남다른 눈이 있다고 자신하던 볼로디아의 완전한 패배. 진실을 담은 극을 평생 꿈꿔왔다면서 극에 담긴 본인의 현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한심한 어느 비평가의 손끝에서 여러 창작자와 배우들이 재기의 힘조차 남기지 못한 채 스러져갔다. 그런 그의 칭찬에 맹목적으로 집착해왔던 스카르파는 승리했지만 패배했다.
극을 만든 현실, 현실로 만든 극, 그리고 그 극을 현실로 만드는 현재가 뒤엉킨 채 패배자 볼로디아는 문을 열고 퇴장한다. 그리고 '무대 밖'으로 나가는 스카르파.
<!!!> 그가 만든 건 현실을 반영한 극인가 극을 반영한 현실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어디까지를 극이라고 말할 수 있고 어디까지를 현실이라 말할 수 있는가. 극이 담는 진실이란 무엇이고 진짜를 담은 연극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는가. 존재 한다한들 그를 알아볼 수 있는 관객은 존재하는가. 진짜를 담은 텍스트를 진짜로 구현해내는 연출은 가능한가. 진짜를 담은 텍스트라는 게 존재하는가.
"만약 우리가 연극에서 잘못됐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삶에서 제거할 수 있다면. 만약 우리가 연극에서 경멸한 그 모든 것을 삶에서 제거할 수 있다면 과연 무엇이 남게 될까. 연극이 엄격하게 요구하는 것들을 삶에는 요구하지 않는다." - 스카르파의 마지막 독백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