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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정여 Oct 12. 2019

잘츠부르크 상인은 우리 부부를 무시한 걸까

해외 원정 싸움(1)

아기를 낳으면 호르몬의 변화 때문에 산후 우울증이 일시적으로 온다고 한다. 세상 긍정적인 내가 이렇게 호르몬에 쉽게 영향을 받는 사람인지 몰랐다. 산후조리원에서 쉬기만 하는데도 해가 지면 그렇게 눈물이 났다. 아기 천사 만났고 전적으로 나를 도와주는 남편이 옆에 있었다. 하지만 밤마다 대책 없이 몰려오는 이유 모를 후회와 회한은 막을 길이 없었다. 말없이 품을 내어주는 남편을 붙잡고 있는 대로 눈물을 흘렸다.


울적한 기분이 들 때마다 남편과 단둘이 해외여행에 갔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벨베데레 궁전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는 남편의 뒷모습, 괌 투몬 비치에서 스노클링을 할 때 우리를 사로잡았던 눈부신 물비늘, 밤 10시 텅텅 빈 태국 방콕의 어느 클럽에서 막춤을 췄던 우리 두 사람. 그리고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싸웠던 남편과 나. 대체 그 좋은 곳들을 다니면서 남편과 왜 싸웠는지 몸서리치게 후회가 됐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들인데.


3년 전 남편과 체코 프라하, 체스키 크룸로프를 거쳐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 도착했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을 사랑하는 우리였다. 호텔에 간단히 짐을 풀고 설레는 마음으로 미라벨 공원으로 향했다. 미라벨 공원은 사운드 오브 뮤직의 트랩 가 아이들이 마리아에게 도레미송을 배운 곳이다. 남편과 손을 잡고 도레미송을 흥얼거리며 걸어가는데 길거리 좌판에서 스노볼을 파는 게 보였다. 나는 여행이나 출장을 갈 때마다 기념으로 스노볼을 산다. 해외에 가면 스노볼을 파는 곳이 생각보다 없어서 눈에 띌 때 사둬야 한다. 두바이에 출장을 갔을 때 길거리에서 파는 스노볼을 지나쳤는데 결국 못 사고 돌아와서 엄청 후회한 적이 있다.


우리 부부는 스노볼을 사기 위해 좌판 앞에 섰다. 상인은 우리보다 앞서 온 손님을 응대하고 있었다. 5분가량 흘렀을까. 상인은 우리에게 기다리라는 소리도 없이 여전히 그 손님과 대화를 나눴다. 좌판 앞에 서있는 게 민망해질 정도였다. 나는 두바이의 기억을 떠올리며 조금 더 기다려볼 작정이었다. 하지만 남편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나는 남편의 눈치를 살피다가 서서히 짜증이 났다. 이 정도는 기다릴 수 있다는 게 내 입장이었다. 남편은 상인이 우리를 무시하는 거라며 불쾌해했다. "됐어. 안 사." 나는 남편을 뒤로하고 걸음을 뗐다.


남편은 따릉이를 타고 어디까지 다녀온 걸까?(출처=서울시)

남편은 부당하게 대우받는 걸 못 견뎌한다. 결혼 초기에는 남편의 이런 태도가 예민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언젠가 우리 부부는 한강에서 서울시 대여 자전거 따릉이를 다. 블루투스 스피커를 챙겨 온 남편이 어떤 음악을 틀지 물어보러 잠시 내 자전거 옆으로 왔다. 그때 자전거 마니아처럼 보이는 아저씨가 우리를 지나치면서 "자전거 나란히 타는 거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아, 자전거를 나란히 타지 않는 게 이 세계의 암묵적인 규칙이구나' 하고 넘겼다.


남편은 아니었다. 그는 잠깐 나란히 탄 것을 두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지나친 간섭을 했다고 여겼다. 우리가 따릉이가 아니라 사제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면 그런 대우를 받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까지 미쳤다. 당장 그 아저씨를 쫓아갔다. 하지만 따릉이가 고가의 프로 자전거를 따라잡을 리는 만무했다. 남편은 분하다는 얼굴로 따릉이를 끌고 터덜터덜 되돌아왔다.


잘츠부르크 좌판 상인이 그렇게 무례한 것은 우리가 동양인이기 때문이라고 남편은 판단했다. 한참 지나 남편의 추측이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상인은 우리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하지만 그때는 남편이 너무 예민하게 구는 것처럼 보였다. 즐거운 여행지에서 결국 기분을 망치고 있구나. 남편의 심기나 살펴야 하는 처지라니. 짜증이 솟구쳤다.


"따로 다니자."


나는 화풀이를 한답시고 유치한 제안을 했다. 남편은 더 유치하게 굴었다. 그는 가지고 있던 내 여권과 돈을 끝내 내놓지 않았다. 나는 씩씩 대면서 호텔로 돌아갔다. 호텔로 가는 길에 여행증명서를 받으려고 영사관 위치까지 검색했다. 한번 한다면 하고야 마는 내 성격을 아는 남편은 끈질기게 내게 연락했다. 나는 "다음 휴가는 따로 가는 걸 약속해야 사과를 받아들이겠다"라고 선포했다. 남편은 몇 번 거절하더니 하는 수 없이 그러겠노라고 약속했다. 우리는 미라벨 공원 앞에서 다시 만났다.


잘츠부르크에 다녀온 지 3년이 흐른 지금에서야 나는 이런 남편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 아기 돌잔치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직계 가족만 소규모로 모인 돌잔치 장소가 술을 취급하지 않아 우리가 준비해야 했는데 업체 매니저가 남편에게 "술을 두 병이나 가져오셨네요"라고 말했다. 옆방에서 메이크업을 받고 있던 내가 들어도 너무 많이 가져왔다고 타박하는 였다. 남편은 내게 카카오톡으로 "불친절하다"라고 메시지를 보내더니 매니저를 불러 단호하게 문제를 제기했다. 매니저는 "수량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차원이었다"라고 해명했지만 언짢은 건 어쩔 수 없었다.


남편은 "아기를 둔 부모들이 어디서나 고개를 숙이는 걸 알고 함부로 대하는 듯하다"라고 말했다. 자신이 지나쳤냐고 묻는 남편에게 나는 "잘했다"라고 답했다. 예전 같으면 그가 또 좋은 날을 망친다고 따졌을 테고 우리 두 사람은 망친 기분으로 돌잔치를 치렀을 것이다. 사전에 술 제한이 있다는 고지를 받지 않은 데다 정당한 대가를 지불한 우리가 진상 손님처럼 대우받는 건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남편은 내가 의외로 자신을 지지해주는 데 놀란 듯했다. 나 역시 남편이 우리 집의 '수문장' 역할을 충실히 해주고 있다는 걸 인정하기 시작한 스스로에게 놀랐다. 우리가 싸우지 않고 이렇게 어른스럽게 일처리를 하다니. 결혼 4년 만에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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