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까부터 주방에서 들리는 남편의 한숨 소리를 못 들은 척하고 있다. 남편은 설거지를 하는 중이다. 대체 무엇이 불만인지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 오늘은 휴가를 낸 남편과 충북 제천으로 놀러 가기로 한 날이다. 나는 소파에 기대앉아 스마트폰으로 예약한 숙소 정보를 검색하다가 남편에게 "우리 숙소가 빌라형이라고 했나?"라고 묻는다. 남편은 대답하지 않는다. 분명히 들었을 텐데. 나는 화를 내는 대신 그가 들으라고 크게 한숨을 내쉰다. 그러자 남편이 더 큰 소리로 한숨을 쉰다.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인지.
설거지를 마친 남편이 거실을 치운다. 나는 여전히 소파에 기댄 채 스마트폰을 만지작 거린다. 남편은 아기 장난감, 수건, 양말, 과자 등등 손에 잡히는 것을 집어 올리더니 "이건 어떻게 해? 저건 어떻게 해?"라며 질문을 퍼붓기 시작한다. 진짜 궁금해서가 아니다. 나를 괴롭히고 싶다는 목적이 분명하다. 나는 참지 못한다.
"물어보지 말고 알아서 해!"
남편도 신경질적으로 반응한다.
"왜 짜증을 내는데?"
결국 못난 엄마 아빠는 아기 앞에서 언성을 높이고야 말았다.오전 10시제천으로 출발하기로 한 우리의 계획은 어그러졌다. 우리는 실랑이 끝에 오후 1시가 다되어서야 차에 올라탔다.
내 남편은 화가 나도 분출하는 성격이 아니다. 대신 기분 나쁘다는 티를 낸다. 신혼 초 주말에 친정을 다녀온 적이 있다. 저녁 먹을 시간이 한참 지나서 집에 도착했는데 남편은 내게 인사만 하고 서재로 들어갔다. 나는 남편이 화가 났다는 걸 감지했다. 부부 중 한 사람의 기분이 좋지 않으면 집안의 기운이 다르다. 하지만 대체 무엇 때문에 기분이 나쁜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내가 화났냐고 물었지만 남편은 아니라고 했다. 나는 나대로 "친정에 다녀온 걸 눈치 준다"라며 남편을 몰아세웠다.
남편은 내가 집에 늦게 오면서 저녁을 먼저 먹으라는 소리도 안 해서 매우 서운했다고 한다.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유치한 이유였는지 아주 뒤늦게 내게 설명해 줬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나라면 "많이 늦어? 나 먼저 저녁 먹을게"라며 메시지를 보냈을 테다. 하지만 남편은 아내가 자신을 걱정해주길 바란다. 그게 사랑이라고 믿는 남자다.
남편이 설거지를 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던 것은 나에게 불만이 있다는 표시였다. 남편은 싱크대에 그릇을 아무렇게나 넣어둔 내게 짜증이 나 있었다. 거실을 치울 때 스마트폰을 보고 있던 와이프도 못마땅했다. 궁금하지도 않은 질문을 해댄 건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아기가 태어난 뒤 설거지는 남편 담당이 됐다.(출처=picjumbo)
하지만 나는 나대로 할 말이 많았다. 나는 주중이든 주말이든 같은 시간에 일어난다. 새벽 5시쯤 배고파 깨는 아기가 알람이다. 아기는 분유를 먹고 다시 잠든다. 그리고는 오전 7시에 완전히 깬다. 나는 쪽잠을 자다가 아기가 깨는 시간에 일어난다. 오전 8시 30분이 되면아기에게 이유식을 먹인다. 이유식을 먹이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아기가 이유식을 꿀떡꿀떡 잘 먹는 것도 아닌 데다 엄청 흘리고 장난을 치면서 먹기 때문이다. 나는 아기가 먹은 식기와 식판을 대충 싱크대에 넣어놓는다. 이때까지는 남편을 깨우지 않는다. 아기를 씻기러 갈 때쯤 남편을 불러 뒤처리를 부탁한다. 남편이 일어나면 그제야 한숨을 돌린다.
아침 일찍부터 아기와 씨름한 내게 남편이 짜증을 낸 건 분명 지나쳤다. 남편이 바로 사과한것은 그도 아내가 고생한 걸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에 올라타서도 불쾌한 기분은 가시질 않았다. 특히 남편이 내 질문을 무시한 데 화가 많이 났다. 그가 거듭 미안하다고 했지만 분이 풀리지 않았다. 아무리 기분이 안좋다한들 사람의 말을 못 들은 척할 수 있는지. 존재 자체를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대체 왜 그런 거야?"
남편에게 재차 물어봤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정말 궁금했다. 남편은 거듭 미안하다고 했다. 하지만미안하다는 말로는 이해 못할 행동이다.
남편은 머뭇거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냥 화가 났는데 화가 났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
남편의 목소리가 떨리는 듯했다. 백미러로 남편을 힐끗 봤다. 칭얼대는 아기를 달래고 있는 그를 보니 마음이 약해졌다. 화가 나는데 화를 내지 못하는 남편의 마음은 오죽할까. 나는 화가 나면 미친 듯이 화를 내고 울기도 하는데. 이런 생각까지 미치자 남편이 딱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 앞으로 그러지 마."
나는 차 시동을 걸었다. 남편은 생각지 못한 나의 쿨한 반응에 놀란 듯했다. 이내 "고마워"라고 말하고는 아기를 달랬다. 아기를 다독이는 그의 목소리는 상기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