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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영 Jul 08. 2024

나의 첫 내담자 k

30대 중반, 사는 것이 내 뜻대로 되지 않고 결혼생활도 자주 뻐걱거리던 어느날, 나는 상담대학원에 원서를 냈다. 내 자신이 왜 이러는지 알고 싶었고 상대의 마음도 알고 싶었다. 첫 사랑과 이별후의 상실감을 늘 가슴에 담고 살아가던 나는 결혼생활을 하면서도 늘 불만을 달고 살았다. 그도 어느 날부터 출근 후에 들어 오지 않는 날들이 많아졌다. 이혼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고 그에게 말하니 이혼은 못한다고 했지만 나는 이제 그만 끝내고 싶었다. 괜찮은 척 행복한 척 하면서 사는 것에 죄책감이 일었다. 이제 그만 떠나 보내고 싶었다. 내 마음속 내면에 있는 많은 부정적인 감정들과 상처들에서 그만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 나부터 치유해야지 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마음이 요동쳤다. 


2003년 대학원에 합격하고 3학기 때 상담 실습을 위해 대학의 카운슬링 센터에 조카 같은 아이들과 상담 수련생이 되어 첫 내담자를 맡게 되었다. 학교에서 배운대로 접수 면접지를 들고 상담실에 들어갔는데 아직 수줍은 소년같은 작은 체구의 남학생이 앉아 있었다. 초기 면접지를 건내며 몇가지 인적 사항과 상담을 하러 온 경위에 대해서 적어 달라고 말한 후, 그후의 시간들이 어찌 지나갔는지 사실 기억은 희미하지만 최대한 초보처럼 보이지 않고 프로 상담자처럼 보이려고 애썼던 기억이 난다. 대학의 상담실은 주로 학교에 적응하기 어려운 학생들이거나, 교우들과 혹은 이성친구와의 관계에서 오는 어려움이 대부분이었다. 


 안경을 쓰고 수줍어하던 k는 현재 하고 있는 공부가 자신과 맞지 않다고 하면서 전과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나는 학교에서 배운대로 경청하고 공감하면서 친절과 배려를 갖춘 미소를 지으려고 노력했다. k도 첫 상담이라 긴장한듯 보였지만 사실 나도 첫 내담자를 만나는 일에 잠도 잘 이루지 못하고  그를 맞이했었다.    나의 첫 상담은 그렇게 끝났고 다음주에 다시 만나자는 약속과 함께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다른 실습생들과 첫 상담을 마친 소감을 서로 말하고 격려하며 실습 일주일이 지나가고 있었다. 처음 써 보는 상담 일지에 상담 내용을 적는데 뭔지 모를 뿌듯함이 일었다.  내가 드디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케어하는 상담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힘든 결혼 생활에 지쳐 있던 나에게 묘한 감동을 주었다.


 일주일은 빠르게 흘러갔다. k와 약속한 시간이 되어서 카운슬링 센터의 작은 실습실에서 나는 다시 상담자로 돌아가서 그의 내면과 마주하고 그의 심리적 발달을 돕기 위해서 기여했다. 조금씩 미소를 지으며 경계를 풀고 나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던 나의 첫 내담자.


" 내 자신을 실현하기 위해 다른 사람이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성장하도록 도움으로써 내 자신이 실현될수 있다."  (마이어 오프- 건강한 상담자만이 남을 도울수 있다.)


마이어 오프는 하이터치 분야에 일하면서 우리는 많은 심리적 보상을 얻게 된다고 했다. 상담자로서 얻게 되는 보상에는 자기 인식이 높아지는 것에서부터 인간관계에 대한 이해가 높아 진다든지 하는 많은 보상이 따른다. 그러한 보상들을 바라고 상담 공부를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 별로 없고 위축되어 있던 k와 상담 하던 순간 나는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았다.


 


k와 같은 내담자들이 자신의 성장과 심리적 건강을 위해 나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내 30대의 시간들을 의미있게 해주었고 내가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자긍심이 들게 해 주었다. 비록 현실에서 나는 결혼에 대한 확신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었지만


그 후 몇 회기 상담을 더 진행하고 아쉽게도 그는 전과를 좀 미루고 일단 군대에 가는 것으로 부모님과 합의하고 군대로 떠나게 되어 상담은 4회기에서 끝나게 되었다


 그뒤, 3개월 정도 시간이 흐른 후, 나는 k로부터 메일 한통을 받았다. 대학원의 남은 학기와 씨름하느라 나는 k를 금새 잊어 버렸지만 메일을 본 순간 반가웠다. 메일의 내용은 나와 상담한 후 마음이 많이 안정되었고 군대에 와서도 잘 지내고 있노라고. 그리고 메일의 마지막에 적었던 k의 글을 20년이 지난 후에도 나는 선명히 기억한다. 비록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 선생님처럼 저도 상담자가 되어서 다른 사람을 돕고 싶어요".

삶은 참 때로 아이러니하다. 나의 결혼 생활은 파국으로 끝나고 있었지만 나는 조금씩 상담자가 되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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