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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Oct 21. 2020

제2 미국은행장 취임과  과감한 금융정책

니콜라스 비들 2

니콜라스 비들(Nicholas Biddle, 1786~1844)은 1786년 필라델피아의 저명한 비들 집안(Biddle family)에서 태어났다.


필라델피아의 비들 집안(Biddle family)


그의 집안은 펜실베이니아를 건설한 윌리엄 펜(William Penn) 시절부터 이 지역에서 살아왔다.


비들의 아버지인 찰스 비들(Charles Biddle, 1745~1821)은 유명한 정치인이자 펜실베이니아주 부지사(1785~87)를 역임하였다.


아버지 찰스 비들  <출처 : 위키피디아>


아울러 미국 독립운동에도 헌신한 경력이 있었다. 벤자민 플랭클린(Benjamin Franklin, 1796~1790)이 이끄는 펜실베이니아 최고집행위원회 부회장도 역임하였다.


비들과 같은 이름인 삼촌 니콜라스 비들(Nicholas Biddle, 1750~1778)은 해군 영웅이었다.


또 다른 삼촌인 에드워드 비들(Edward_Biddle, 1738~1779)은 1774년 제1차 대륙회의 회원이었다.



동생인 토머스 비들  <출처 : 위키피디아>



그의 남동생 토머스 비들(Thomas Biddle, 1790~1831)은 '1812년 미국-영국' 전쟁 시에 포병대 고위 장교로 참전한 전쟁 영웅이었다.


이처럼 필라델피아의 명문가 이자 애국자 집안에서 태어난 비들은 어린 시절부터 명석했다.


대학 졸업과 유학, 탁월한 금융 업무 수행


학습에 대한 이해와 욕구, 의지가 높아 펜실베이니아 대학(University of Pennsylvania)으로 입학했다. 얼마 후 프린스턴 대학(Princeton_University, 당시에는 뉴저지 대학)으로 편입, 여기서 졸업했다.



프린스턴 대학  Nassau Hall (1756년) <출처 : 위키피디아>



그는 대학 공부를 마치기 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 중 연방정부의 요청으로 공식적인 직책도 맡았다.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한 금융 행정업무였다.


당시 루이지애나 매입과 관련된 업무는 프랑스 대사였던 존 암스트롱 주니어(John_Armstrong_Jr., 1758~1843)가 맡아 진행하고 있었다. 비들을 한눈에 알아본 암스트롱에 의해, 재정 실무를 담당했다.


영국의 베어링스 은행 담당자들과 교류를 통해 매입 협상 등 금융 관련 업무를 경험한 것이다. 제퍼슨 대통령의 특사로 파견 나온 제임스 먼로(James Monroe, 1758~1831, 미국 제5대 대통령)를 이 시기에 만났다.


프랑스 대사 존 암스트롱 주니어  <출처 : 위키피디아>


1807년 비들은 미국으로 돌아왔다.


포트폴리오 편집장과 하원의원 당선


그는 법학을 중심으로 공부했는데, 정치에도 관심이 많았다. 1806~23년에 출판된 '포트폴리오(Port-Folio)'라는 잡지의 부 편집장이 되었다가 능력을 인정받아 바로 편집장이 되었다.


이후 1810년 펜실베이니아 주 하원의원(Pennsylvania House of Representatives)으로 당선되었다.


당시에는 1811년 '제1 미국은행(First Bank of the United States)'의 면허 정지를 놓고 의견이 분분한 시점이었다. 그는 프랑스 유학 생활을 통해 금융에 대한 실력과 안목을 길렀다.



'제1 미국은행'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그의 의견도 해밀턴과 갤러틴처럼 '제1 미국은행' 연장 안에 찬성이었다. 주 의회에서 강하게 연장 의사를 표시했지만, 대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연장은 실패했다.


이 시기에 '루이스와 클라크 탐험대(Lewis and Clark Expedition)'의 출판 보고서를 지원했다.


아울러 결혼도 했다. 부인 이름은 제인 마가렛 그레이크(Jane Margaret Craig, 1793~1856)이었다. 슬하에 6명의 자녀를 두었다.



제인 마가렛 그레이크   <출처 : 위키피디아>


'제2 미국은행' 설립과 제3대 은행장 취임


'1812년 미국-영국' 전쟁이 끝났다. 비들은 '제2 미국은행(Second Bank of the United States)'의 설립을 위해 노력했다.


당시 그의 위치는 펜실베이니아 상원의원이었다.


그는 은행 설립의 당위성과 필요성에 대해 주장했고, 여론 및 금융 관계자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았다. 결국 1816년 제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James Monroe)에 의해 '제2 미국은행'은 설립에 성공했다.


그는 1819년 '제2 미국은행' 이사로 참여해 업무를 진행했다. 이후 2대 은행장인 랭던 취비스(Langdon Cheves, 1776~1857)가 사임하자 뒤를 이어 제3대 은행장으로 취임하였다. 이때가 1823년이었다.



니콜라스 비들 초상화  <출처 : 위키피디아>  


취임 시기는 좋지 않았다. 1819년 미국 최초의 경제공황(Panic of 1819)이 시작되어 경기 침체가 진행되고 있었다.


과감한 금융정책의 시행과 성공


취임 후 바로 금융 정책을 시행했다.


가장 먼저 통화 공급을 조절했다. 아울러 주법은행(State Bank, 각 주의 은행법에 근거하여 설립된 은행) 관리도 시작했다. 남발된 은행권이 많은 주법은행을 대상으로 '금태환(은행권을 동일 가치의 금으로 교환하는 것)'을 시작한 것이다.


주법은행은 '금태환'을 줄이기 위해 은행권 발급을 스스로 조절해 나갔다. 할인율이 높은 주법은행권이 서서히 줄어들었다. 아울러 금리 규제를 통해 과도한 이자율을 높이지 못하게 했다.

 


제2 미국은행이 발행한 1000달러 어음  <출처 : 위키피디아>,


더불어 '최종 대부자(last resort)' 역할을 맡아 자본이 부족해진 주법은행에 긴급대출을 제공했다. 연방정부의 재정 대리인 역할을 진행한 것이다.


현재의 중앙은행 역할로서 당연한 업무이지만,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방법이었다.


결국 금융 안정화를 이루었고 '제2 미국은행'의 위신과 권위를 높이는 데 성공했다.


아울러 주법은행의 할인율을 개선하는 정책을 시행, 과도한 은행권 할인에 힘들어하는 서부지역 주법은행의 손해를 막아주었다.



'제2 미국은행'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제2 미국은행' 기간 연장 충돌


덕분에 기존에 갖고 있던 '제2 미국은행'에 대한 사람들의 불신은 많이 사라졌다.


하지만 큰 고민거리가 있었다. '제2 미국은행'의 면허 기간 연장 건이었다. 1836년 재 연장이 되어야만 금융 정책은 유지, 발전될 수 있었다.


은행의 면허 연장을 극렬하게 반대하는 앤드루 잭슨(Andrew Jackson,  1767~ 1845)이 1828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앤드루 잭슨 대통령   <출처 : 위키피디아>


잭슨은 노골적으로 은행에 대해 반대 표시를 했다. '기득권의 상징'이라는 표현도 거침없이 사용했다.


비들은 조바심이 났고, 어떡해서든 해결 방안을 찾아야 했다. 결국 무리하게 정치적 영향력을 시도했고, 오히려 잭슨의 반대 의지를 더 확고히 만들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발생된 사건을 ‘은행 전쟁(Bank War)'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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