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정엽 Nov 02. 2020

샐먼 체이스의 탄생과 정치 활동

샐먼 체이스 장관과 제이 쿡 이야기 2 

샐먼 P. 체이스는 1808년 뉴햄프셔 주 코니쉬(Cornish, New Hampshire)에서 태어났다.


체이스의 생가  <출처 : 위키피디아>


그는 9살에 아버지를 여의였고, 성공회 대주교였던 삼촌 필랜드 체이서(Philander Chase, 1775~1852)와 같이 살았다.


노예제도 폐지 주장과 불행한 가족사


성직자의 길을 가길 원했던 삼촌의 뜻과 달리, 법학자의 길을 가기로 한 체이스는 신시내티 대학교에서 공부 한 뒤, 다트머스 대학교(Dartmouth College)에 입학,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삼촌 필랜드 체이서  <출처 : 위키피디아>



한때 윌리엄 워트(William Wirt, 1772~1834, 제9대 법무부 장관) 밑에서 법률을 공부하기도 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오하이오 주의 신시내티에서 개업했다.


체이스는 노예제도에 대해 반대 입장이었다. 너무도 확고했다. 변호사 생활 중 도망한 노예를 적극적으로 대변했다. 그의 생계를 걱정하는 친구의 만류뿌리치줄기차게 반노예제도 선봉에 섰다.


그의 결심과 의지는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체이스의 개인적인 인생사는 매우 불행했다.


총 3번의 결혼을 하게 되는데, 모두 부인과의 사별이 원인이었다. 6명의 자식 중 4명은 어린 나이에 사망해 그를 매우 힘들게 했다.



딸 케이트 체이스 <출처 : 위키피디아>


두 번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케이트 체이스(Kate Chase, 1840~1899)는 나중에 아버지의 정치적 활동을 도와주게 된다.


1793년 도주노예법


1793년에 제정된 ‘도주노예법(Fugitive Slave Act of 1793)’은 자신의 에서 탈출한 노예를 다시 되찾아 올 수 있는 권리를 보장했다.



도주노예법  삽화



남부에서 탈출한 노예들이 북부로 도망을 가더라도, 노예 주인은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다.


이 법은 자유를 찾기 위해 북부로 도망친 수많은 노예들이 언제라도 주인에게 소유권이 있다는 뜻이었다.


북부의 자유주 들도 이를 지켜만 보고 있지 않았다.


1800년대부터 ‘개인 자유법(Personal liberty laws)’을 제정, 시행했다. 탈출한 노예의 안전을 보장하는 법이었다.


도망 노예를 위한 법무장관


연방정부 법률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나름대로의 자구책을 만든 것이었다.



 자유를 찾기 위한 탈출  <출처 : 위키피디아>


체이스는 도망 후 오하이오 주에서 체포된 노예들을 위해 적극 변호했다. 그의 신념이었다. 


당시 그의 별명은 ‘도망 노예를 위한 법무장관(Attorney General for Fugitive Slaves) ‘이었다.


참고로 1793년 도주노예법은 이후 법률 내용이 강화되어 ’ 1850년 도주 노예법(Fugitive Slave Act of 1850)‘으로 재탄생하게 다.



1850년 도주 노예법 삽화  <출처 : 위키피디아>


1850년 도주 노예법


법안의 주요 내용은 ’ 탈출한 노예는 체포해야 하며, 주인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아울러 연방정부의 공무원과 시민은 이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 ‘는 것이었다.


이 법은 노예 제도에 대한 국민 여론을 두 갈래로 쪼개 놓는데 일조했고, 남북전쟁이 발발하게 된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체이스는 1849년 오하이오에서 상원의원에 선출되었다.


이후에도 노예 제도의 확대에 반대하는 새로운 정당을 구성하기 위한 지도자 역할도 했다.



현 공화당 로고



그는 1854년 공화당(Republican Party, 약어 GOP(Grand Old Party))의 창립 멤버였다.


오하이오 주지사와 1860년 공화당 전당대회


1855년에 제23대 오하이오 주지사로 선출되었다.


사실상 오하이오 최초의 공화당 주지사였다. 1856년부터 1860년까지 재직하며 여성의 권리와 공교육 확대, 교도소 개혁을 지원하는데 주력했다.


파란만장한 정치인의 삶이었지만, 이제 시작이었다.


항상 대권의 꿈을 놓고 있지 않던 그에게 '1860년 공화당 전당대회(1860 Republican National Convention)'는 새로운 기회의 시작이었다.



1860년 공화당 전당대회  <출처 : 위키피디아>


하지만 노예제도 반대의 강경한 이미지가 호감을 떨어뜨렸다. 네 번의 투표를 통해 에이브러햄 링컨이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링컨의 대통령 후보 지명


당시 링컨은 서부지역(오늘날의 중서부 지역)의 표를 가져올 수 있을 정도로 지역 내에서 유명했다.


아울러 온건파 유권자들의 호감을 얻을 정도로 설득력 있게 노예제를 반대하는 토론과 연설을 했다. 전국적인 명성을 얻을 정도로 논리적 이었다.


링컨 대통령  <출처 : 위키피디아>


낙선한 체이스는 대선의 꿈을 놓지 않았고 이후에도 계속 대권도전했다. 이는 현직 대통령인 링컨의 심기를 거슬렀지만, 남북전쟁이 끝날 때까지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1861년 남부연합이 탄생하면서 전쟁의 기운을 알아챈 링컨은 체이스를 재무부 장관에 임명했다.


재무부 장관 취임


그는 재무부에 관한 경험이나 지식이 없었기에 그리 탐탁히 여기지 않았다. 법률가이자 주지사 경험으로 행정에는 밝았지만 금융에 관한 재정 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너무도 약했기 때문이다.


막상 전쟁이 터지자 체이스만큼 뛰어난 역량을 발휘한 사람을 찾기 힘들 정도로 많은 업적을 쌓았다.


체이스 재무부 장관  <출처 : 위키피디아>


그의 앞에 닥친 과제는 이전에 없었던 엄청난 난제였지만, 결국 해결했다.


전쟁을 북부의 승리로 이끈 금융의 원동력을 만들어 낸 것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남북전쟁 승리의 원동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