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티 그린(Hetty Green, 1834~1916)은 1834년 보스턴서쪽의뉴베드퍼드(New Bedford, Massachusetts)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
당시 이 곳은 포경업으로 유명한 도시였다.
주요 사냥 대상은 향유고래였고, 약 200여 척이 넘는 포경선이 있었다.
뉴 베드퍼드의 모습(1863년) <출처 : 위키피디아>
그녀의 아버지 에드워드 로빈슨(Edward Robinson)은 뛰어난 사업가였다.
시기적절한 투자를 통해 부를 일군 사람이었다.
퀘이커교 가문의 한 사람으로 1800년에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다. 여러 사업을 진행하다가 1833년, 뉴베드퍼드로 자리를 옮겨 정착했다.
이 곳에서 ‘아이작하우랜드주니어앤컴퍼니(Isaac Howland Jr.&company)’라는 회사를 알게 되었고, 창업주인 ‘아이작 하우랜드 주니어’를 만났다.
에드워드 로빈슨 <출처 : 위키피디아>
아이작은 1755년에 태어나 이 곳 포경 사업의 토대를 구축한 사람이었다. 그는 로빈슨과 동업을 하게 되었다.
로빈슨은 이곳 출신인 아비 로빈슨(Abby Robinson)과 1833년 12월에결혼했다.
이후 동업자 아이작의 급작스런 사망으로 사업 유산을 이어받게 된 로빈슨은, 회사의 핵심 인사가 되었다.
1834년 11월, 헤티 하우랜드 로빈슨(Henrietta Howland Robinson)을 낳게 되는데, 그녀가 바로 전설적인 여성 투자가 헤티 그린이다.
헤티 그린의 탄생과 어린 시절
헤티는 외가댁에서 주로 성장을 하게 되는데, 외할아버지인 기드온 하우랜드 앞에서 경제신문을 읽어주며 투자 안목을 키웠다.
이 시기에 주식과 채권, 투자방식과 성공 사례 등, 경제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을 깨달았다.
어린 시절의 가족 농장 <출처 : 위키피디아>
그녀는 매사추세츠 주 사우스 다트머스의 해안가 근처인가족농장 라운드힐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녀의 남동생은 태어난 뒤 얼마 안 되어 사망했다.이 때문에 아버지 로빈슨은 크게 낙담했다.
아버지의 실망은 자기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없다는 뜻이었다.
때문에 여자인헤티는 아버지의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성장했고, 고집과 집념이 강한 성격으로 자랐다.
그녀는 그 어떤 장난감이나 인형보다 돈에 대한 애정이 강했고, 악착같이 집착했다.
다만 자신을 위해 돈을 쓰거나 사치하기보다는, 모으고 저축하는 성격이었다.
어머니는 그녀가 어렸을 때 사망했다.
어머니의 자매인 실비아(Sylvia Ann Howland)는 척추 이상으로 평생을 침대에 누워있어야만 했다.
나중에 조카인 헤티 그린과 그녀의 상속인들과 법정 싸움을 벌이게 되는'유언장 소동'의당사자였다.
젊은 시절의 헤티 그린 <출처 : 위키피디아>
젊은 시절의 헤티 그린
젊은 시절의 헤티는 상당한 미모를 가지고 있었으나, 연애나 사치, 허영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었다.
아버지 회사나 회계사 사무실, 바닷가 부두에서 시간 보내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선원이나 일꾼 들과 어울려 그들과 대화하는 것을 즐겼고, 이들의 거친 용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미국의 포경선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당시 기준으로, 헤티는 명백한 상류층 이았다. 하지만 이들에게 따돌림을 받았는데, 항구에서 배운 거친 용어를 거리낌 없이 사용한 것이 한 몫했다.
상류층은 품위 있는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기존의 선입견을 깨뜨린 것이 주원인이었다.
나중에 치열한 법정 다툼이나 경쟁 관계의 투자자들과 전혀 밀리지 않고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의 경험과 대범함이 몸에 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사회적 기준은 철저한 남성 중심이었고, 여성의 투표권이 없던 시절이었다.
특히 뉴욕 월스트리트에서여성 투자가는 전무한 상태였다.
여자라는 이유로 주요 투자 정보나 경제적 뉴스, 정치적 따돌림은 당연했다. 언론의 선입견도 이를 부채질했다.
법정에서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그러나 그녀는모두 이겨냈다.
오직 자신의 능력과 직감, 탁월한 투자 감각으로 홀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이다.
남북전쟁 이후와 자본가의 등장
1861년 남북전쟁의 발발로 뉴베드퍼드의 포경선은 해군에 징발되었고, 포경산업은 계속 감소되었다.
해티의 아버지 로빈슨은 직감적으로 포경산업의 하락을 눈치챘고 투자 중심지를 뉴욕으로 옮겼다.
이후 부동산과 해상운송으로 투자 방식을 바꿔 나갔다.
뉴베드퍼드 해안가 모습(1863년) <출처 : 위키피디아>
경제발전과 산업의 성장을 정확하게 파악한 것이었다.
남북 전쟁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한 산업의 규모는 일명 ‘자본가’라는 단어를 만들어 냈다.
한 시대의 산업 구조를 만들어낸 앤드루 카네기(Andrew Carnegie, 1835~1919), 존 D.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Sr., 1839~1937), J. P. 모건(J. P. Morgan, 1837~1913), 짐 피스크, 제이 굴드 등이 이 시기에 주로 활동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에게 전혀 밀리지 않았던 이가 헤티 그린이었다.
젊은 시절의 J.P. 모건 <출처 : 위키피디아>
남북전쟁이 끝났을 때, 이들 자본가는 전쟁의 참혹함을 뒤로하고 평등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믿음 대신 자본의 시대가 열릴 것을 대비했다.
결국 미국의 경제 구조가 바뀌었고, 생활방식도 변화되었다.
흔히 '자본주의(capitalism)'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된 것이 이 시기였다.
제조업의 발달(철도, 강철, 석유 등)과 대량생산 체제의 도입은 기존 시대에 없었던 많은 자본을 필요로 했다.
이를 가능하게 만든 이가 금융계의 J. P. 모건(John Pierpont Morgan, 1837~1913)이었다. 금융이 산업을 지배하게 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금융가들과 헤티 그린(우측 상단 여성)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월스트리트의 마녀
헤티 그린은 이들과 같은 시대를 살아간 사람이었다. 자신만의 투자 방법과 철학으로 한 시대의 부를 일군 여성이었다.
다른 이의 피눈물을 이용하지 않았고, 자신의 확고한 투자 방식과 절약으로 성공했다.
하지만 언론은 '월스트리트의 마녀(the Witch of Wall Street)'라는 별명으로 그녀를 조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