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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Apr 02. 2021

'월스트리트의 마녀'라 불린 헤티 그린

헤티 그린 2

헤티 그린은 1834년에 태어나 1916년 죽을 때까지 탁월한 미국의 여성 사업가였다. 당시 가장 부유여성으로도 알려져 있다.


헤티 그린 공식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월스트리트의 마녀'라 불린 헤티 그린


반대로 ‘월스트리트의 마녀’로 불릴 정도로 악명 높았던 구두쇠로 불렸다.


이처럼 양 극단의 평가를 받기 쉽지 않음에도, 그녀에 대한 자세한 자료는 많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의 사망 당시 남겨진 유산은 약 1억~ 2억 달러 규모였는데, 2020년 기준 평가 시, 약 22억 달러에서 47억 달러로 추정된다(자산의 변동 폭이 큰 이유는, 주식과 부동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많은 재산은 유산을 받아 이룬 것이 아니었다. 


오직 그녀의 투자 능력과 절약, 끈질긴 노력으로 이루어 냈다.



헤티 그린 <출처 : 위키피디아>


그녀의 투자 방식과 철저한 소비 생활


그녀의 투자 철학은 단순했다. 가격이 내려가면 사고, 올라가면 팔았다.


이러한 투자 방법은 ‘1907년 금융공황’ 때도 손해를 입지 않을 정도로 완고했다.


철저한 남성 중심 체계인 월스트리트에서도 전혀 기가 죽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소신을 펼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다만 자신을 위한 지출은 전혀 하지 않아 동시대(당시는 흥청망청 돈을 쓰는 도금 시대였다)의 다른 이들에게 따돌림과 심한 조롱을 받았다.


짠돌이, 구두쇠, 수전노라고 까지 불리기도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투자 방식에 철저했고, 다른 이의 험담에도 개의치 않았다.


당당했다. 자신의 소신에 대해 굽히지 않았다.



반려견과 함께 <출처 : 위키피디아>


수많은 법정 싸움과 부정적 평가


법정에서의 수많은 다툼도 꿋꿋하게 자신의 의견을 주장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부의 본질에 더 가까운 행동을 하였다.


하지만 당시 기준으로 사람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돈이 많으면 큰 집도 사고 흥청망청 돈을 쓰면서 사는 게 부자의 모습이었다.


헤티의 근검절약하는 모습은 부자가 되고자 몸부림치는 이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이질감을 느꼈다.


이러한 모습이 그녀의 역사적인 평가가 지금까지 좋지 못한 이유였다.


선구자였지만 질투를 받았고, 원칙론자였지만 조롱을 받았다.


그녀의 재산은 아들과 딸에게 유산으로 남겨졌다.


이후 이들의 자손이 끊기면서 엄청난 재산 모두 다른 이들과 지역 사회에 상속되었다.


헤티의 아들인 그린 (사진 우측 상단의 안경 쓴 사람)  <출처 : 위키피디아>


그녀의 재산 중 대부분이 부동산과 주식, 채권이었다.


철도회사 주식과 채권, 토지와 건물 등을 사고팔았다. 광산을 소유하기도 했고, 교회와 공장 등에 대출을 해 주어 건물 등의 담보물을 소유했다.


심지어 뉴욕시를  포함한 대도시에 직접 자기 자금을 대출 해 주어 재정적 어려움을 해결해 주기도 했다.


대신 금리는 가장 낮게 제시했고, 자신이 생각한 이상의 이윤을 원하지도 않았다.


다만 계약 방식을 어길 시에는 예외 없이 중단했다.


이렇게 철저한 그녀는 지출민감했다. 일평생 모으기만 할 뿐, 돈을 거의 쓰지 않고 살았다.


세금이 아까워 서민들의 주거지에 살았고, 주소를 수시로 옮겼다.



헤티 그린이 말년에 살던 집 <출처 : 위키피디아>


굳건한 투자 원칙


언론은 그런 모습을 검소함 대신 인색함으로 표현했다. 그녀의 투자 방식을 탐욕으로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숙달된 금융의 투자 방식과 정확한 선구안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장점은 크게 부각되지 못했고, 사람에 대한 겸손함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못했다.



도금 시대 당시 철도산업의 강도 귀족을 묘사한 삽화   <출처 : 위키피디아>



자신의 욕심을 위해 남을 밟고 올라서는 시대에, 그녀의 투자는 다른 이의 피눈물을 이용해 키우 않았다.


카네기와 록펠러의 방식은 철저하게 자신의 우월적 재력을 이용해 경쟁사를 무너뜨리는 전략을 사용했다.


트러스트 방식은 약육강식이었다. 당시에는 독점과 합법적 강탈이 허용될 정도로 법의 보호가 취약했다.


결국 남의 재산을 강제로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록펠러 소유의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 풍자 삽화  <출처 : 위키피디아>



헤티의 방식은 오직 자신의 직관과 경험, 투자 원칙에 따라 가격이 떨어진 자산에 집중했다.


남의 재산을 강탈하거나 약점을 이용해 빼앗지 않았다. 


헤티 그린의 아들과 딸


하지만 다른 자본가에 비해 언론을 이용하거나 기부에 인색했다.


그녀의 아들인 에드워드 하울랜드 로빈슨 그린(Edward Howland Robinson Green , 1868~1936)의 다친 다리를 잘라야 했던 사건은 그녀의 평을 최악으로 몰아갔다.


참고로 아들의 다리는 치료 시기를 놓쳐 한쪽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 이 때문에 그녀는 평생 죄책감에 살았다.


아들인 그린과 헤티의 딸인 해리엇 실비아 앤 하울랜드 그린 윌크스(Harriet Sylvia Ann Howland Green Wilks, 1871~1951)는 어머니의 임종을 지켰고, 그녀의 재산을 상속받아 자산을 더 키웠다.



헤티의 딸인 실비아(우측)와 그녀의 남편(뒤쪽) <출처 : 위키피디아>


헤티의 사후, 아들인 그린은 막대한 재산을 더 늘렸고, 상속자 없이 사망했다.


딸인 실비아 역시 상속자 없이 죽음을 맞이했다.


헤티 그린과 딸인 실비아, 아들인 그린의 막대한 재산은 여러 친척과 63개의 자선 단체, 교육기관에 유산으로 나눠졌다.


실질적으로 수많은 재산 대부분이 사회로 환원된 것이다.



헤티 그린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그녀의 사후 평가와 사회 환원


헤티의 죽음 이후〈뉴욕타임스〉사설에는 ‘어마어마한 재산을 모으는 동안 그녀가 보여준 청빈함과 겸손’에 대한 내용이 게재됐다.


한 시대를 풍미한 여성 사업가는 자신의 능력으로 막대한 부를 이루었다.


모든 재산을 자식에게 상속하여 부의 대물림을 이어간 투자가와는 달리, 그녀의 막대한 재산은 자식 대에 이르러 사회에 환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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