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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Oct 05. 2021

해밀턴의 ‘제조업에 관한 보고서’

기술과 산업의 발달 1

미국 독립 후 임명된 초대 재무부 장관인 알렉산더 해밀턴은 자신의 견해가 담긴 세 번째 보고서를 1791년 12월경 의회에 제출했다.


미국 제조업에 관한 보고서


신생국 미국의 제조업 육성과 발전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제목은 '제조업에 관한 보고서(Report on Manufactures)'였다.



초대 재무부 장관인 알렉산더 해밀턴  <출처 : 위키피디아>



핵심 내용은 제조업을 증진하기 위해 연방정부가 추진해야 할 다양한 제안을 담았다.


방향은 크게 2가지였다. 


첫 번째로 제조업의 성장은 장기적인 국가 경제의 기본적인 시스템으로, 적극적인 육성이 필요하기 때문에 관세를 통한 자원을 마련하여 지원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해외에 팔고자 하는 수출 품목은 세율을 낮춰 미국 제품이 외국에서 가격 경쟁력을 가질 수 있게 했다. 사실상 보조금 지원의 성격이었다.


아울러 값싸게 들어오는 외국의 특정 품목에 대해 높은 관세를 적용, 관세수입으로 수출품에 대한 지원금을 적용하자고 주장했다.


지원금의 대상은 미국의 주력산업이었던 농업이 아닌, 제조업으로 선정했다.


제조업의 성장 만이 살길이다


이어 두 번째 방향은 산업 발전을 이끌 특별한 제조업에 대해 산업 장려금을 지급, 장기적으로 전문성을 갖춘 인재가 미국으로 이민 와 정착할 수 있도록 하자고 했다.


결국 미국 제조업의 육성은 물론 고용 기회까지 제공하여 미래의 인재를 양성, 제조산업을 성장시키자는 것이었다.


이 내용이 의회에 공개되자마자 바로 반론이 쏟아졌다.


북부 중심의 제조업 정책이라며 농업 중심의 남부 주에 속한 의원들이 비난의 화살을 퍼부은 것이다.


남부의 극심한 반발


남부 중심의 제퍼슨과 공화파 ‘차별적 법안’이라는 항의가 쏟아졌고, 북동부를 위해 만들었냐는 특혜 시비까지 이어졌다.

 


남부 정치세력의 중심인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  <출처 : 위키피디아>



하지만 해밀턴은 이에 굴하지 않고 조목조목 이유를 들어 설명했다.


현재 미국이 처한 위치에서 성장 모델로 삼아야 할 국가는 영국이었음을 솔직히 시인했다.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의 성공으로 유행처럼 번진 자유무역 수출 구조로 전 세계 경제를 주름잡고 있었다.


전 세계 제조업의 중심은 영국이었고, 이를 통해 미국이 수입하는 물건의 70~80퍼센트도 영국산이었다.


수출의 불균형에 따른 국가의 부는 계속 유출되고 있었고 농업만으로는 그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것이 해밀턴의 주장이었다. 


해밀턴의 설득과 의회 승인 실패


보호관세 정책을 시행하여 자국 내 부족한 제조업을 육성, 자생력을 갖춘 뒤 당당하게 경쟁을 통해 수출의 길을 넓혀 보자고 했다.


하지만 남부 의원들을 설득하지 못했다.


결국 기나긴 협상 끝에 관세율 인상에 관한 내용은 의회를 통과했지만, 산업 보조금의 경우는 실패했다.



중상주의가 절정에 달했던 1639년 프랑스 항구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특정 산업의 보조금이 지급되면 제조업자의 이익만 남기게 될 뿐, 농업을 운영하고 있는 농부들과의 형평성 측면에서 공정하지 못하다는 주장 강했다.


보조금 지급의 반대편에 선 의원들은 담배와 목화를 유럽에 수출해온 남부 출신들이 주를 이루었기에 쉽게 설득이 되지 않았다.


결국 해밀턴이 손을 들었고 보고서는 최종 채택이 되지 못했다.


당시 미국의 주력 경제인 농업


이를 반대하는 의원들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가 가는 말이었다. 사실 해밀턴의 제조업 육성에 관한 보고서는 시대를 앞서간 측면도 있었다.


향후 미국 경제가 농업에서 제조업 중심으로 전환한 뒤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이 시기 해밀턴의 주장은 틀리지 않았고 앞을 내다본 그의 안목이 오히려 놀라울 정도였다.


하지만 당시 경제 중심은 농업이었다.


워낙 땅이 넓어 토지 가격이 저렴하여 농업에 집중하는 것으로도 인력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미국의 농업 - 콤바인으로 밀을 수확하는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여기서 생산된 농산물이 전체 수출 품목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높았기에 주력 수출품이 아닌, 아직까지 손에 잡히지 않는 제조업에 보조금을 지급한다는 것은 당시 남부 출신의 의원들이 이해하기 불가능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농업은 노동집약적 산업이었고, 수출하는 규모에 비해 장기적인 성장의 한계가 뚜렷했다.


미래의 희망인 제조업 육성


이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주력 산업을 다각화해야 한다는 것이 해밀턴의 의견이지만 의회 내 반대편인 공화파의 주장은 너무도 강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약 20년의 시간이 흘러 1810년 제퍼슨 대통령 시대의 재무부 장관인 앨버트 갤러틴도 유사한 내용의 보고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해밀턴과 적대적 관계였던 갤러틴이 제조업자를 지원하기 위한 연방 대출 프로그램을 제안한 것이었다.


그도 제조업 육성이야 말로 향후 미국 경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설명했다.



앨버트 갤러틴 <출처 : 위키피디아>



이 두 보고서의 내용 중 중요한 공통점이 한 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경제 활동에 필요한 금융자본의 부족’이었다.


당시의 미국 경제는 토지 중심의 경제 구조로 인해 모든 자본이 토지 수확물에 한정되어 있었다.


토지를 이용해 자본을 모아야 한다


해밀턴과 갤러틴은 이런 현실을 아쉬워했던 것이다.


토지가 돈의 기능을 할 수 있다면, 구입을 위한 대출이나 매매가 자유롭게 진행된다면, 실제 경제 활동에 필요한 자본이 충분히 공급될 것이라는 생각이 강했다.


이 자본으로 제조업을 육성, 시행한다면 미국은 유럽 국가에 뒤지지 않는 경제구조를 가질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미국 10달러 지폐의 주인공인 알렉산더 해밀턴 <출처 : 위키피디아>



하지만 당시는 아니었다. 너무도 앞서간 나머지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렇지만 두 명의 재무부 장관이 제시한 방향은 정확했고, 약 100년 뒤에 제조업의 강국으로 우뚝 서게 된다.


그 시작은 제분법의 혁명을 불러온 올리버 에반스를 시작으로 다양한 산업기술의 발전으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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