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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Mar 13. 2021

미국의 승전보와 필리핀, 괌의 점령

미국-스페인 전쟁 3

전쟁의 발발과 '옐로 저널리즘'


1898년 2월 메인  폭발 이후 침몰 원인에 대한 미국의 결과가 발표되자, 언론이 앞장서 흥분했다.


'로 저널리즘(Yellow journalism)'의 선두 격이었던 두 신문사는 전쟁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주장했고, 시민들도 동참했다.


회복되기 시작한 경제가 전쟁으로 다시 무너질까 염려했던 대통령이 마침내 움직였다.

 


메인 호 폭발 사건의 배후에 대한 신문 기사  <출처 : 위키피디아>


4월 11일 매킨리 대통령(William McKinley, Jr., 1843~1901)은 의회에 쿠바 개입을 요청했고, 의회는 바로 승인했다(상원 찬성 42대 반대 35, 하원 찬성 311대 반대 6)


쿠바의 독립을 지지하며, 필요시 미국의 자원과 인력을 동원하여 지원할 것임을 밝혔다.


사실상 전쟁의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4월 20일 대통령의 최종 결의안 서명 후, 이 내용을 스페인에 전달했다. 스페인 정부는 즉각 국교를 단절하고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미국 - 스페인 전쟁 장면 <출처 : 위키피디아>


사실 당시의 국력으로 보아 결과는 뻔히 정해져 있었다.


미국과 스페인의 군사력 차이


과거 강대국의 추억만 가진 스페인은 점차 저물어 가는 노을이었다.


신생국가인 미국은 남북전쟁 이후 폭발적인 산업력이 밑바탕에 깔려 있어 떠오르는 태양이었다. 경제적인 차이가 명백했다.


당시 미국은 자국 내 영토 확장과 개척이 끝나 있는 상황이었다. 외부로 국력을 뻗어 나가야 할 시점이었다.


이에 눈 앞에 위치한 쿠바는 중요한 지리적, 전략적 요충지였다.

 


미국의 야망 - 스페인 신문 이미지 <출처 : 위키피디아>


아울러 태평양을 통한 확장 정책의 일환으로 하와이 병합을 진행하고 있었다.


아시아에 위치한 필리핀도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곳은 아시아 지역 동쪽 끝에 위치하여 중국과도 가까운 나라였다. 섬으로 구성되어 자원도 풍부해서 미국의 동방 진출에 최적인 곳이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미국은 전쟁을 시작했고, 최초의 전투는 쿠바가 아닌 필리핀에서 발생했다.



미 해군의 조지 듀이 제독 <출처 : 위키피디아>



필리핀에서의 해전


당시 필리핀은 스페인의 식민지였다. 미국은 이곳부터 손을 댔다.


전쟁 선포 일주일 뒤인 5월 1일, 조지 듀이(George Dewey, 1837~1917) 제독이 이끄는 미 해군의 함대가 필리핀의 마닐라 만에서 파트 리시오 몬토 조(Patricio Montojo y Pasarón) 제독의 스페인 함대를 격파했다.



마닐라만 전투 - 스페인 해군의 참패  <출처 : 위키피디아>


이 전투에서 스페인 해군은 381명, 미 해군은 9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미국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바로 마닐라 항구를 점령했다.


이후 듀이 제독은 스페인의 필리핀 통치를 반대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필리핀 지도자 에밀리오 아기날도(Emilio Aguinaldo, 1869~1964. 필리핀 제1대 대통령)를 데려왔다.


당시 홍콩 망명 중인 아기날도는 1896년부터 필리핀 독립운동을 진행하고 있었다.


아기날도는 필리핀의 독립을 바란다는 듀이 제독의 말을 믿고 필리핀 내 지지 세력을 모아 미국과 함께 스페인 군과 싸우게 다.



에밀리오 아기날도 <출처 : 위키피디아>


미국의 필리핀 점령과 에밀리오 아기날도


하지만 미국은 결코 필리핀을 포기하지 않았다. 후에 듀이 제독은 아기날도가 자신의 말을 잘못 오해했다고 발표했다.


나중에 속은 것을 알게 된 아기날도는 필리핀 독립을 위해 미국과 전쟁을 치르게 된다.


이것이 '미국-필리핀 전쟁(Philippine–American War, 1899~1902)'의 원인이 되었다. 이는 '미국-스페인 전쟁' 후 발발했다.


미 해군의 마닐라 항구 점령 후 필리핀의 주요 섬에 미군이 상륙하고 침공해오자, 스페인 군은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하고 항복했다.


자국의 영향력 축소를 우려하여 홍콩에서 출발한 영국과 프랑스, 독일 함대는 정리 상황을 파악했다. 바로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승인한다고 발표했다.


강대국들이 미국 편으로 돌아서 버리자, 스페인은 대외명분까지 상실한 채 국제적 외톨이가 되었다.  



찰스턴호의 헨리 글래스 함장 <출처 : 위키피디아>


미 해군의 괌 점령


이후 6월에는 미 해군 순양함 찰스턴호(USS  Charleston)의 선장 헨리 글래스(Henry Glass, 1844~1904)가 괌을 별다른 저항 없이 점령했다.


당시 괌의 스페인 관리들은 미국과 스페인과의 전쟁 소식을 전혀 듣지 못한 상태였다.


미 해군 찰스턴호의 함포 공격에, 자신들을 위한 예포 소리로 착각하여 격려 차 함정에 승선했다가 포로가 돼 버린 웃지 못할 사건이 발생했다.



1898년 6월 괌 점령 사건  <출처 : 위키피디아>


미 해군으로부터 전쟁 상황을 듣게 된 스페인 관리들은, 대책을 마련했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후 약 54명의 스페인 병사와 함께 항복했고, 미국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괌을 점령했다.


1668 년부터 스페인의 지배를 받아왔던 이 곳은 이때부터 미국령으로 주인이 바뀌었다.


현재도 미국의 중요한 전략적 지역에 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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