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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Mar 29. 2021

록펠러 주니어의 인생과 업적

존 데이비슨 록펠러 7


존 D. 록펠러 주니어(John Davison Rockefeller Jr., 1874~1960)는 스탠더드 오일을 세운 록펠러의 자식 중 유일한 아들이었고 막내였다.


존 D. 록펠러 주니어 <출처 : 위키피디아>


존 D. 록펠러 주니어의 업적


그는 사업가이자 금융가였고, 아버지 이상의 자선가였다.


흔히 말하는 금수저 중의 금수저였지만, 다른 부자 댁 도련님과는 다른 점이 많았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자선 활동과 기업의 사회적, 도덕적 윤리에 관심이 깊었다.


1914년 발생된 '러들로 대학살(Ludlow Massacre)'은 그에게 많은 교훈을 주었다.  


내성적인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희생자 가족과 콜로라도 광부들을 직접 만나 근본적인 해결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러들로 대학살 <출처 : 위키피디아>



말년에는 자선활동에 매진했고 자연환경 보전과 교육 기관 기부에 주력했다. 그가 기부한 금액은 당시 5억 달러 이상으로 추산된다.


그의 탄생과 어린 시절


록펠러 주니어는 1874년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태어났는데, 위로 4명의 누나가 있었다.


어린 시절 교회 소속의 학교를 다녔고, 대학은 시카고 대학의 총장 윌리엄 레이니 하퍼(William Rainey Harper, 1856~1906)의 권유로 침례교 기반의 브라운 대학교를 졸업했다.



브라운 대학교 <출처 : 위키피디아>



조용한 성격으로 꼼꼼하게 회계 입출금 내역을 정리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다른 부자 학생들과는 소비 성향이 달랐다.


그는 예술학을 전공했는데, 칼 막스(Karl Marx, 1818~1883)의 자본론 등 사회과학 분야를 같이 공부하기도 했다.


'러들로 대학살'의 교훈과 영향


1914년 4월에 발생된 '러들로 대학살'은 그의 사업방향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의 지분이 포함된 CF & I (Colorado Fuel and Iron) 회사에서 발생된 이 사건은, 무리한 노조 진압으로 20여 명의 어린이와 여성, 일부 남성이 사망한 사건이었다.



마가렛 생거 <출처 : 위키피디아>



여론의 대대적인 비난도 했지만, 미국의 작가이자 간호사, 여성 운동가인 마가렛 생거(Margaret Higgins Sanger, 1879~1966)는 '러들로를 결코 잊지 말고 기억하자'는 강경한 기사로 그를 집중 공격했다.


록펠러 주니어는 향후 캐나다 총리가 되는 윌리엄 라이언 매킨지 킹(William Lyon Mackenzie King, 1874~1950)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이례적으로 그가 직접 콜로라도로 가서 광부와 희생자 가족을 만나 그들의 사정에 귀 기울이는 정성을 보였다.



윌리엄 라이언 매킨지 킹 <출처 : 위키피디아>



노조의 조건을 받아들인 한편, 보다 개선된 노동 조건을 제시하였다. 노조는 투표로 이 안건을 승인했다.


향후 새로운 노사관계 정립의 기준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모습으로 아버지에 비해 인간적이라는 평을 받게 됐다.


사업 활동과 역할


그는 스탠더드 오일의 이사직을 수행했지만, 주로 금융과 부동산 쪽 업무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건설 중인 록펠러 센터(1933년) <출처 : 위키피디아>



특히 아버지의 유산으로 현 체이스 은행(Chase Bank)의 대주주이자 투자가이기도 했다.


1920년 후반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사무직, 회계직 등 주요 관리 직책을 맡게 한 뉴욕의 던버 국립은행(Dunbar National Bank)을 직접 설립하기도 했다.



넬슨 알드리치 <출처 : 위키피디아>


그는 1901년 10월에 미국 로드아일랜드의 상원의원이자 공화당 지도자인 넬슨 알드리치(Nelson Wilmarth Aldrich, )의 딸인 아비게일 그린 알드리치(Abigail Greene Aldrich, 1874~1948)와 결혼했다.


결혼과 부인인 아비게일 그린의 활동


넬슨 알드리치 의원은 향후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근간이 되는 '알드리치 플랜(Aldrich Plan)'의 주인공이었다.


언론에서는 자본과 정치의 완벽한 조합이라고 보도했다.


아비게일 그린 알드리치 <출처 : 위키피디아>


둘 사이에서는 여섯 명의 자녀를 두었고 이중 아들인 넬슨 록펠러(Nelson Rockefeller, 1908~1979)는 미국의 제41대 부통령을 역임하기도 했다.



뉴욕 현대미술관 <출처 : 위키피디아>


부인인 아비게일은 미술에 남다른 관심과 열정을 보였는데, 뉴욕 현대미술관(MoMA, Museum of Modern Art)은 그녀의 주도적인 역할로 탄생하게 되었다.


록펠러 주니어는 아버지에게 지지 않을 정도로 많은 돈과 부동산을 기부했지만, 이후에도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 쓸 정도로 남달랐다.


타임지 표지의 록펠러 주니어 <출처 : 위키피디아>


사회구조적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


특히 보건위생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부인인 아비게일의 권유로 여성의 임신 및 인구 문제에 노력하는 마가렛 생어(언론을 통해 그를 공격한 여성 작가)에게 많은 자금을 제공하기도 했다.


아울러 성 문제 및 경찰행정 등 사회구조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


또한 '러들로 대학살' 사건을 기초로 매킨지 킹과 함께 노사관계 문제를 프린스턴 대학 및 기타 기관에서 주요한 학문 분야 및 연구 과제로 만들었다.


뉴욕 유엔본부  <출처 : 위키피디아>


그는 자신이 매입한 부동산 중 일부는 뉴욕 유엔본부(Headquarters of the United Nations)에 기증하기도 했고, 개신교와 침례교에도 상당한 금액을 기부했다.



태튼 국립공원 <출처 : 위키피디아>


자연환경 보전을 위한 관심


특히 자연환경 보전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태튼 국립공원(Grand Teton National Park), 메사 베르데 국립공원, 아카디아 국립공원, 그레이트 스모키 산맥 국립공원을 포함한 많은 국립공원 조성에 자신의 돈으로 토지를 구입, 헌납했다.


특히 1920년대 캘리포니아 주 훔볼트 레드우드 주립공원(Humboldt Redwoods State Park)에는 '록펠러 숲'이 있을 만큼 공원 조성에 크게 기여했다.



훔볼트 레드우드 주립공원 <출처 : 위키피디아>


그는 5월, 애리조나 주 투손에서 86세의 나이에 폐렴으로 사망했다.


가부 문화의 새로운 정립


아버지인 록펠러와 그의 세대에 쌓은 기반을 바탕으로 후손들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위치에서 자리를 잡아갔다.


탄탄한 인적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금융자본가, 정치가, 환경운동 보호가가 되었던 것이다.


아들인 넬슨 록펠러 <출처 : 위키피디아>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이들이 미국 사회에 제공한 막대한 기부금은 기부 문화를 새로이 정립했다.


그 전통은 지금도 다른 사업가나 금융자본가 등에 의해 계승되어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것이 미국이 가지고 있는 강력한 유산이자, 그들만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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