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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Mar 23. 2021

록펠러와 부인 로라 스팰맨의 업적

존 데이비슨 록펠러 4

록펠러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다.


록펠러의 종교와 깊은 신앙심


그에게 종교적 신념을 심어준 이는 어머니였다. 일평생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록펠러 초상화(1917년) <출처 : 위키피디아>


어린 시절, 신앙심 깊은 어머니의 실천하는 모습은 항상 집을 비운 아버지와 비교되었다. 큰 차이점이었다.


그녀는 어려운 살림살이 속에서도 예배 후에 적돈이라도  헌금과 기부를 했다. 록펠러는 이 모습을 보고 자라왔다.


당연히 아들에게도 동일한 행동을 하게끔 교육했다. 이러한 모습은 그의 습관이 되었다.


록펠러는 평생 담배는 물론 술도 입에 대지 않았는데, 종교적 영향이 가장 컸다.


미국 최초의 침례교회(로드 아일랜드) <출처 : 위키피디아>


아울러 교회 예배 참석은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꼭 지켰다.


록펠러의 소명과 기부


독실한 북부 침례교도였던 그는 매일매일 성경을 읽고 일주일에 두 번 예배에 참석했다. 아울러 부인과 함께 성경 공부 모임을 직접 이끌어 가기도 다.


'돈을 많이 벌고 그 돈을 많이 기부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결심과 습관을 갖게 해 준 어머니를 평생 존경했다.


직장생활을 시작한 시점인 16세부터 정해진 비율의 헌금과 기부를 해 왔다. 이러한 내용을 개인 장부에 성실하게 기재한 흔적 등지금도 남아 있다.


젊은 날의 록펠러(1875년) <출처 : 위키피디아>


자신의 수입 중 6%를 꼬박꼬박 자선단체 등에 기부해온 것이다.


이후 20살 이후에는 그 비율을 10%로 올렸고 실질적인 십일조 헌금을 시작했다.


남북전쟁 중에도 이러한 행동은 멈추지 않았고, 황폐화된 남부연합 지역에 학교 설립을 위한 기금 모금에도 기꺼이 동참했다.


특히 흑인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는데, 그 영향은 부인에게서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부인인 로라 스팰맨 록펠러 <출처 : 위키피디아>


록펠러의 부인인 로라 스팰맨 록펠러


록펠러 부부는 여행 중이라도 일요일이 되면 아프리카계 미국인 침례 교회 예배에 참석하여 상당한 액수의 금액을 헌금하기도 했다.


록펠러의 부인인 로라 스팰맨 록펠러(Laura Spelman Rockefeller, 1839~1915)는 록펠러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실천력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1839년 오하이오주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부모는 철저한 청교도인이었다. 노예제 폐지론을 몸소 행동으로 실천한 사람이었다.


말년의 로라 스팰맨 록펠러  <출처 : 위키피디아>



그녀도 이러한 영향으로 평생 노예제 폐지론은 물론 흑인들의 교육열 향상에 엄청난 노력과 기부를 다.


그녀가 록펠러를 만난 것은 클리블랜드의 학교 회계 수업에서였다. 그녀의 어린 시절 꿈은 학교 교사였다고 한다. 1864년인 25살에 록펠러와 결혼했다.


그녀는 남편의 사업에 깊게 관여하지 않았고, 철저하게 자식들 양육과 자선사업에 노력했다.



아들인 존 데이비슨 록펠러 주니어 <출처 : 위키피디아>


흑인 여성의 교육과 인권 신장의 노력


총 1남 4녀의 자식을 낳았다. 막내가 아들인 존 데이비슨 록펠러 주니어(John D. Rockefeller Jr., 1874~1960)이다.


그녀는 평생 흑인 여성의 교육과 인권 신장에 노력했으며 애틀랜타 침례교 여성 신학교를 금전적으로 지원했다.


스팰맨 칼리지 학생들 <출처 : 스팰맨 칼리지>



특히 그녀의 막대한 기부금과 후원으로 자리를 잡은 조지아주 애틀랜타에 있는 스팰맨 칼리지(Spelman College)는 흑인 여성을 위한 대학교이다.


이 대학을 통해 수많은 흑인 여성 인권론자가 배출되었다.


록펠러는 부인에 대해 '그녀의 지혜로움은 나보다 낫고, 조언은 결고 틀린 적이 없었다'라고 공식적인 내용을 남길 만큼 믿음이 절대적이었다.



스팰맨 칼리지  학생들 <출처 : 스팰맨 칼리지>


그녀의 사후에 록펠러는 부인의 이름을 딴 '로라 스팰맨 록펠러 기념관(LSRM, Laura Spelman Rockefeller Memorial)'을 1918년에 지었는데 약 7,400만 달러를 기부했다.


수많은 기부금을 통한 사회적 업적


이 돈은 기념관이 존재하는 동안 사회과학 분야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가장 많은 자금을 지원받은 시카도 대학교(The University of Chicago)는 '도시 공동체와 사회, 정치 제도'에 대해 많은 결과물을 산출할 수 있었다.



시카고 대학교 <출처 : 위키피디아>



록펠러는 은퇴 후 자신의 막대한 재산을 교육 및 공공보건 위생 개선을 위해 기부했고, 실제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기초과학의 발전에 주력했는데, 의학에도 막대한 재산을 쏟아부었다.


시카고 대학교를 설립했고, 록펠러 재단을 세워 병원·의학 연구소·교회·학교 등의 문화 사업에 전념했다.


뉴욕에 위치한 록펠러 대학교(Rockefeller University)는 미국 내 생명과학 학문을 연구하는 세계적인 명성의 연구중심 대학이다.



록펠러 대학교 <출처 : 위키피디아>



1901년 록펠러 의학연구소로 시작된 이 곳은 1965년 록펠러 대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 대학은 생명과학과 연관된 노벨 생리의학상과 화학상을 받은 수상자를 수없이 배출했다(2020년까지 38명).


록펠러는 자선 사업에 몰두하다 1937년 9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록펠러 센터 <출처 : 위키피디아>



그의 사업은 아들인 존 D. 록펠러 2세가 계승했다.


지금도 많은 후손들이 정계·재계에서 활동하여 미국 내 유명한 록펠러 가문을 형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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