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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Apr 04. 2021

조지 피바디의 일생

J.P. 모건 이야기 1

J.P. 모건 가문의 역사를 살펴보기 이전에, 앞서 한 사람이 경제 역사 속에 이름을 알렸다.


피바디의 탄생과 어린 시절


그의 이름은 조지 피바디(George Peabody, 1795~1869)였다.



조지 피바디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유럽에서 더 유명했다. 흡사 찰스 디킨스의 소설《크리스마스 캐럴(A Christmas Carol)》에 나오는 스크루지와도 같은 인물이었다.


피바디는 매사추세츠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일곱 형제 중 한 명이었고, 10대였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렸을 때부터 형의 가게에서 일하며 가족의 생계를 도왔다. 이 시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성공한 후에도 어린 시절의 궁핍한 생활에 대해 자주 언급했을 정도로 어려운 나날이었다.


하지만 몸에 익힌 절약 정신과 근면함은 평생 습관이 되었고, 은퇴 후 자선활동을 펼치게 된 원인이 되었다.


조지 피비디가 출생한 집  <출처 : 위키피디아>



금융가로서의 시작과 영국 이주


그는 1816년(21살)에 볼티모어로 이주, 사업가와 금융가로서 경력을 시작했다.


당시 국제 금융의 중심지는 런던과 암스테르담, 파리였다. 거래 수단은 금이었다.


특히 대영제국의 위상이 전 세계를 호령하던 시절이라, 런던치지 않고서는 금융업자로 설 곳이 없었다.


그는 미국 내 자본 조달을 위해 유럽의 상인 은행과 관계를 돈독히 유지하기로 결심했다. 충분한 자본금은 필수였던 만큼, 착실히 돈을 모으며 신용을 쌓아 나갔다.


이 시대에 유럽이 바라본 미국은 하나의 개발도상국 위치였다. 섣불리 많은 자본을 투자하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큰 시장이었다.


미국의 1837년 금융공황 <출처 : 위키피디아>



그래도 미국 자본 투자의 근거지는 영국과 유럽이었다. 이들의 자본 없이 미국의 산업은 성장하기 어려운 구조였다.


피바디는 42살(1837년)에 세계 금융의 수도였던 영국 런던으로 이주하여 미국을 대표하는 은행가가 되었다.


당시 그의 역할은 미국 주 정부가 발행한 채권을 영국의 금융가들에게 매각하고 수수료를 챙기이었다.


20여 년간 사업을 통해 쌓은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메릴랜드주의 채권 판매를 주력사업으로 진행했다. 신용을 쌓아가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생 국가인 미국의 신용도는 높지 않았다. 산업화가 시작된 남북전쟁 이전 시대였고 1837년 금융공황의 영향이 남아 있었다.



1887년 미국 철도 노선  <출처 : 위키피디아>



미국 주 정부의 채권 판매


미국 내에서는 주 정부가 앞다투어 채권을 발행, 이 돈으로 지역 내 철도 및 운하를 건설하는데 주력하고 있었다. 이 자본을 공급하는 임무를 수행한 것이 피바디의 은행이었다.


피바디는 많은 공을 들였다. 미국의 투자 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주력으로 밀었던 메릴랜드주가 파산을 발표했다. 펜실베이니아, 미시시피, 인디애나, 아칸소, 미시간 주도 채권 이자를 갚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주 정부 채권이 헐값이 되다시피 했다. 가격이 폭락했다.


영국의 투자자들은 난리가 났고, 이 모든 책임을 피바디가 덮어쓰게 됐다. 당시에는 채권 판매를 대행한 은행이 공급한 채권의 상환에 대해 책임을 지는 구조였다.

 

그는 영국 사교계에서 굴욕적인 모욕을 당하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영국 투자자들과 미국 메릴랜드 주 정부를 끈질기게 설득하여 이자만이라도 먼저 갚아나갈 수 있는 협상안을 만들어 냈다.



영국 런던의 동상 <출처 : 위키피디아>



이어 파산의 위험을 안고 절반으로 떨어진 미국 주 정부 채권을 모두 인수했다.


미국의 성장과 채권 판매의 성공


얼마 뒤 극적 반전이 일어났다.


1848년부터 유럽 내 혁명의 불길이 타 올랐다. 왕실이 무너지면서, 불안해진 유럽 은행들이 보유하고 있던 유럽 국가의 채권을 앞다투어 팔았다. 대신 미국의 채권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이 시기 멕시코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엄청난 크기로 영토가 늘어났다. 미래 성장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었다.


이에 더해 캘리포니아의 골드러시가 터지면서 미국 채권 매입 열기는 한층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피바디 문장  <출처 : 위키피디아>



피바디가 소유하고 있던 미국 채권 가격이 폭등했다. 높은 가격에 매각을 했고 초대박을 맞았다.


영국 내 그의 지위가 상승한 것은 물론 미 연방정부와 주 정부의 채권 판매도 대부분 그의 손을 거쳐 판매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런 막대한 부에도 그의 검소함은 매우 철저했다. 싸구려 마차를 탔고, 지불하고 남은 잔돈 하나하나까지 직접 챙길 정도였다. 막대한 재산을 쓸 줄 몰랐다.


그는 결혼을 하지 않아 자식이 없었다. 혼외 자식이 있었으나, 죽을 때까지 모른 척했다.


주니어스 스펜서 모건과의 동업


자식이 없던 그는, 사업 유지를 위해 미국 내 실력 있고 유력한 금융업자를 물색했다. 친구의 추천으로 주니어스 스펜서 모건(Junius Spencer Morgan, 1813~1890)을 만나게 됐다.



주니어스 스펜서 모건 <출처 : 위키피디아>


당시 주니어스는 이제 막 영국의 금융을 배우는 단계였지만 사업적 치밀함과 꼼꼼함은 피바디를 만족케 했다.  


피바디는 주니어스 모건과 동업을 시작했고, 계약 기간은 10년이었다. 사실상 주니어스 모건이 회사를 이끌었다시피 했다.


10년 뒤, 피바디는 약속을 어기고 자신의 투자금을 모두 빼내어 은퇴를 다.


피바디의 파트너로 일하게 된 주니어스 모건은 금융가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다지게 되었다. 피바디의 명성을 이용한 것이 주효하게 작용한 것이다.


당시 피바디 은행의 명성은 영국 내 로스차일드, 베어링스 은행에 이어 제3위의 은행이었다.


참고로 주니어스 모건은 피바디와 결별 후 'J.S. 모건 앤 컴퍼니(J.S. Morgan & Co.)'를 세워 금융업을 이어갔다. 이후 아들인 J.P. 모건 시대에 이르러 미국 금융자본주의의 시작을 알렸다.



젊은 날의 제이피모건  <출처 : 위키피디아>


은퇴와 자선사업의 시작


피바디는 은퇴 후 본격적인 자선사업가로 나섰다.


그는 상당히 냉정하고 병적으로 인색했다고 전해졌는데, 말년에는 이와 정반대였다. 금융업에서 손을 뗀 뒤 막대한 재산의 대부분을 기부했다.


대표적인 것이 1862년 영국 내 '피바디 기부 기금(Peabody Donation Fund, Peabody Trust)'으로 런던 중심부에 저렴한 주택을 지어 제공한 것이다.



피바디 기부 기금으로 건설된 주택  <출처 : 위키피디아>



이는 생활이 어려운 영국의 노동자에게 낮은 비용으로 양질의 주택을 제공것이었다.


미국에서는 피바디의 기부금으로 건축된 하버드 대학교의 '피바디 고고학 및 민속학 박물관(Peabody Museum of Archaeology and Ethnology)', 예일 대학의 '피바디 자연사 박물관(Peabody Museum of Natural History)' 등이 유명하다.  


피바디 고고학 및 민속학 박물관  <출처 : 위키피디아>



이 외에도 수많은 공공건물과 도서관, 박물관을 그의 기금으로 지을 수 있었다.


그의 죽음과 미국 문화에 끼친 영향


피바디는 74세의 나이로 영국 런던에서 사망했다.


그가 죽은 후, 웨스트민스터 학장의 요청으로 빅토리아 여왕의 승인을 받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장례식이 진행될 정도로 영향력이 컸었다.


그의 유예는 최신예 영국 전함 모나크호(HMS Monarch)에 실려 미국에 운구되었다.


웨스트 민스터 사원의 피바디 장례식  <출처 : 위키피디아>


그의 업적은 단순히 유럽 내 미국 금융 선구자이자 자선사업가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제자이기도 한 그는 검소, 시간 엄수, 강직함 등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자신의 힘으로 부를 이루어 기부 문화를 만들어 낸 것이다.


당시 유럽의 기부 문화는 상속으로 받은 재산과 토지를 대중에게 박물관이나 미술관 형태로 제공하는 방식이었는데, 피바디가 진행한 것은 이와 달랐다.



예일 대학의 '피바디 자연사 박물관 <출처 : 위키피디아>



단순히 돈을 주어 생활을 일시적으로 개선시키는 방식이 아니었다. 교육을 통해 근본적인 삶의 변화를 만들어 가게 한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기금은 공립학교 건설과 도서관 건립, 뿌리를 찾을 수 있는 역사적 박물관 건설 등 사실상 미국의 차세대 인재가 나올 수 있는 근본 바탕을 세우는 에 집중되었다.



피바디 도서관 내부 <출처 : 위키피디아>



특히 지역사회 중심의 교육 시설 건립은 그 뒤를 이은 카네기와 록펠러 등이 기부 문화를 올바르게 이어나갈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 놓았다.


미국의 기부 문화는 나라를 부강하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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