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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Apr 06. 2021

모건 하우스의 시작, 주니어스 스펜서 모건

J.P. 모건 이야기 2

존 피어폰트 모건(John Pierpont Morgan. 이하 J.P. 모건)의 아버지 주니어스 스펜서 모건(Junius Spencer Morgan 1813~1890)은 1813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 웨스트 스프링필드(Springfield)에서 태어났다.


말년의 주니어스 스펜서 모건 <출처 : 위키피디아>


모건 가문의 시작


그는 모건(Morgan) 가문의 한 명이었다. 모건 가는 미국이 아닌, 17 세기 영국 웨일스에서 시작되었다.


윌리엄 모건(William Morgan)의 아들인 마일스 모건(Miles Morgan)이 주인공이었다. 


그는 새로운 기회를 찾기 위해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왔다.



마일스 모건  동상 <출처 : 위키피디아>



1636년 4월, 매사추세츠(Massachusetts)에 도착한 그는 스프링필드에 정착했다. 땅을 개척했다. 농장에서 일하며 비교적 편안한 삶을 살았다.


그의 후손들은 다양한 직종에서 일을 했지만 금융과는 연관이 없었다.


자손 중 한 명인 조셉 모건 3세(Joseph III, 1780~1847)에 이르러서야 오늘날에 알려진 금융업에 진출했다.


조셉 모건 3세의 사업적 활동과 성공


그는 선조들이 가업으로 여긴 농장 경영을 하지 않았다. 대신 사업가이자 금융가로서 서서히 영역을 넓혀 나갔다.


1817년에 매사추세츠 주 스프링필드의 농장을 모두 매각했다.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하트포드로 이사한 조셉은 '하트포드 커피 하우스(Hartford Exchange Coffee House)'를 매입하여 운영했다.



1877년 하트포드 시 지도 <출처 : 위키피디아>



이곳은 단순한 커피점과 숙박점이 아닌, 지역의 비즈니스 업무와 사회 활동의 중심이 되었다.


사업가들과 미팅하고, 협력하는 장소였다. 새로운 고객을 만나고 기존의 사업을 확장하는 중개 거래 역할도 수행했다.


1825년 7월 하트포드 은행을 인수했고 이어서 애트나 화재보험사(Aetna Fire Insurance Company) 초기 투자에 참여했다.


애트나 보험회사는 조셉의 선견지명으로 '1835년 12월 뉴욕 대화재' 당시, 보험금 지급을 망설이는 투자자를 설득하여 즉각 지급했다. 손해를 봤지만 높은 신뢰도를 얻었다.


신용도가 상승하면서 쏟아지는 주문으로 이익을 얻었다. 호텔사업에도 진출, 호황을 누리면서 사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주니어스 스펜서 모건 <출처 : 위키피디아>



주니어스 스펜서 모건의 탄생과 금융업의 시작


이러한 조셉 모건 3세의 아들이 바로 주니어스 스펜서 모건(Junius Spencer Morgan, 1813~1890)이었다.


주니어스는 특출한 아버지 밑에서 사업적 식견과 경험을 배울 수 있었다. 특히 금융업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주니어스는 16살의 나이에 보스턴(Boston)의 알프래드 웰스(Alfred Welles)에 입사하여 사업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1836년에 시인이자 변호사, 목사인 존 피어폰트(John Pierpont, 1785-1866)의 딸인 줄리엣 피어폰트(Juliet Pierpont, 1816-1884) 결혼했다.


스펜서 모건의 장인 존 피어폰트 <출처 : 위키피디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부를 바탕으로 1836년부터 1853년까지 건조물 사업에 종사했다.


보스턴에서 가장 큰 무역 소매점 중 하나인 JM비비(JM Beebe & Co.)의 파트너로 참여했던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뛰어난 사업적 수완을 발휘했고,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의 인생을 뒤바꾼 계기는 1853년 유럽 여행이었다.



조지 피바디 <출처 : 위키피디아>



조지 피바디와의 동업


영국 런던에서 미국 출신의 금융가인 조지 피바디를 만나게 됐다.


1854년 피바디의 머천트뱅크(Merchant bank, 상인은행)인 '조지 피바디 컴퍼니(George Peabody & Co.)'의 파트너로 초대되어 본격적인 금융업에 뛰어들게 되었다.


그는 영국 자본이 미국으로 유입될 수 있는 중간 역할을 수행했다. 이렇게 금융업의 경력을 쌓은 세월이 10년이었다.


주니어스는 상당히 운이 좋았다. 자신의 역량과 능력으로 유럽에서의 인맥 형성은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을 피바디의 명성을 활용하여 귀족과 상류층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덕분에 유럽 내 가장 중요한 미국 은행으로 키울 수 있었다.


사실상 은행 운영은 그가 도맡아 했다. 수익도 좋았다.


1864년 은행 설립자인 피바디가 계약 조건대로 은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처음 약속과 다르게 자신의 자본금과 이익을 모두 빼내 갔다. 아울러 회사 이름에서 자신의 이름도 빼 달라고 주문했다.


10년간 고생한 주니어스 모건이 뒤통수 맞은 것이다.



J.S. 모건 컴퍼니와 J.P. 모건  <출처: 위키피디아>



'JS모건 컴퍼니' 설립


홀로 남게 된 주니어스 모건은 회사명을 'JS모건 컴퍼니(JS Morgan & Co.)'로 바꾸었다. 뉴욕과 런던에 본사를 두고 있었고 주 업무는 머천트뱅크(Merchant bank, 상인은행)역할 이었다.


그의 은행은 19세기 중반 미국과 영국 간의 신용  정보를 교환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고 아들인 J.P. 모건도 참여했다.


남북전쟁  <출처 : 위키피디아>


미국 남북전쟁 시에는 전쟁 채권을 판매했다.


전쟁터에서 발생된 정보를 사전에 파악한 J.P. 모건의 도움으로 낮은 가격에 매입하여 높은 가격에 사고팔았다. 수익률이 높았다.


JS모건 컴퍼니는 1871년에 발생된 보불전쟁(프랑스-프로이센 전쟁, 1870~1871)을 통해 일약 명성을 얻게 되었다.


유럽의 새로운 강대국인 프로이센에 속절없이 밀리고 있던 프랑스의 채권을 도맡아 운영했던 것이다.


당시 유럽에서의 대규모 은행들은 프랑스 대출을 망설이고 있었다.


가장 규모가 큰 로스차일드 은행은 프랑스가 패할 것으로 예상하여 채권 인수와 판매를 진행하지 않았다.


포로로 잡힌 나폴레옹 3세와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  <출처 : 위키피디아>


베어링스 은행은 프로이센 정부의 채권을 인수하여 판매하고 있었다. 굳이 프로이센의 심기를 건드리기 싫었다.


프랑스 정부 채권의 인수와 성공


결국 파산의 위험을 무릅쓰고 주니어스가 나섰다.


그는 신디케이트를 구성하여 프랑스 정부가 발행한 채권을 매입했다. 규모는 1천만 파운드로 미화 약 5천만 달러였다.


이 채권은 판매 후 액면가의 절반 가까이 폭락했다. 손해를 본 채권은 주니어스가 모두 인수했다. 사실상 파산이 눈 앞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프랑스는 프로이센이 철수 한 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대응했다. 채권을 액면가로 모두 상환해 주었다. 주니어스는 단번에 아마 어마 한  부를 거머쥐었다.


보불전쟁의 Gravelotte 전투 <출처 : 위키피디아>


이러한 그의 행동은 금융계에서 상당히 이례적으로 받아들였고, 프랑스 측으로부터 상당한 호응을 얻었다.


참고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Franco-Prussian War, 1870~1871)은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Seven Weeks' War, 1866)'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을 패배시킨 오토 폰 비스마르크 독일 총리가 강대국인 프랑스를 침공하여 독일의 통일을 마무리 짓고자 일으킨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프랑스 제2제국과 프로이센 왕국 간에 벌어졌다.


프랑스 파리의 함락으로 통일 독일의 대관식이 베르사유 궁에서 벌어지는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되었다.


흔히 보불전쟁(普佛戰爭)이라고 불린다.


1871년 1월 베르사유 궁전에서의 독일 제국 선포 <출처 : 위키피디아>


J.P. 모건의 교육과 마차 사고


주니어스는 철강왕 카네기와의 만남을 통해 그의 사업을 지원하기도 했다.


아들인 J.P. 모건을 통해 1879년에는 윌리엄 밴더빌트(William H. Vanderbilt)가 소유한 뉴욕 센트럴 철도(New York Central Railroad) 주식의 상당한 양을 런던에서 매각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평생을 아들인 J.P. 모건의 가르침에 집중했다. 33년간 아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애지중지했다.


주니어스는 1890년 4월, 마차 사고로 입은 부상으로 사망했다.



월스트리트 23번가 더 코너  <출처 : 위키피디아>


모건 하우스의 시작


그의 금융업은 아들인 J.P. 모건에 의해 더 커졌고, 강해졌다. 주니어스는 모건 하우스의 실질적인 창시자였다.


아들인 J.P. 모건과 그 아들대에 이르러 미국 및 유럽의 금융과 경제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


'금융자본주의'라는 용어는 모건(Morgan) 가문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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