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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Apr 08. 2021

J.P. 모건의 역할과 영향력

J.P. 모건 이야기 3

존 피어폰트 모건(John Pierpont Morgan, 1837~1913, 이하 피어폰트 모건)은 1837년 미국 코네티컷주 하트퍼드에서 태어났다.


미국 하트퍼드 위치 <출처 : 위키피디아>


당시의 시대적 상황


그가 출생한 시기노예제도가 운영되고 있었고 농업 중심의 경제구조를 유지하고 있던 였다.


산업화의 시작을 알린 남북전쟁은 그의 출생 후 24년 뒤에 발발했다.


자본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만큼 산업의 규모가 작았다. 대규모 인력으로 유지되철도산업이 탄생하기 이전이었다.


필라델피아의 '제2 미국은행' 건물 <출처 : 위키피디아>



우연히도, 그가 태어난 해에 잭슨 대통령에 의해 '제2 미국은행(Second Bank of the United States)'의 면허가 종료되었다.


이처럼 미국은 아직까지 농업 중심의 신생국가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피어폰트 모건 이후의 시대


하지만 피어폰트 모건이 사망한 1914년에는 모든 것이 바뀌어 있었다. 금융을 통한 자본의 공급으로 유럽의 쟁쟁한 국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경제 규모가 커져 있었다.


유럽의 산업이 오히려 미국 자본을 필요로 할 정도였다.


제1차 세계대전 시 영국의 포병부대  <출처 : 위키피디아>


이후 발생된 제1차 세계대전은 이를 증명하는 사건이었다. 유럽에게 사용되는 막대한 전쟁 물자의 공급이 가능할 정도로 미국의 산업 및 경제 규모는 정상에 있었다.


그 중심에는 기간산업에 자본을 공급 가능케 한 머천트뱅크(Merchant bank, 상인은행)가 있었다.


이들 중 최고의 위치에서 굳건히 자리를 지킨 이가 바로 피어폰트 모건이었다.


피어폰트 모건의 성격과 업무 스타일


피어폰트 모건은 철도 회사의 인수, 합병에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그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아버지인 주니어스 스펜서 모건(Junius Spencer Morgan)을 도와 금융업에 전념했다. 철도 산업에 투자된 대규모 영국 자본의 관리 업무를 도맡아 진행했다.


젊은 시절의 피어폰트 모건 <출처 : 위키피디아>


그는 꼼꼼하고 신중한 아버지 주니어스와 달리 무척 고집이 세고 강했다. 본인이 원하는 것은 망설임 없이 진행했다. 한번 추진하면 멈추는 일이 없었다. 추진력이 남달랐다.


반면에 회사 장부를 보는 안목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회계에 능통했다.


연초에 자신의 은행 장부를 직접 감사하기도 했다.


말이 많은 것을 싫어했고, 귀족적 스타일의 진중함과 고급스러움을 추구했다. 이는 그가 수집한 수많은 미술품과 예술품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모건의 도서관  <출처 : 위키피디아>


미국 금융 역사에서 피어폰트 모건이 가장 먼저 손꼽히게 된 이유는 크게 3가지이다.


미국 금융사에 영향을 준 세 가지 내용


먼저, 남북전쟁 이후에 무분별하게 펼쳐진 철도 산업의 구조 개편을 직접 진행한 것이다.


흔히 '모거니제이션(Morganization)'이라 불리고 있다.


이는 경쟁이 치열하여 적자가 발생하던 수많은 철도 회사 사업 구조를 재편하여, 이익이 나는 방향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이후 배당을 통해 투자자의 이익을 보장해 주었다.


당시 미국 철도 회사의 3분의 1이 모건의 지배를 고 있었다.


철도 산업의 강도 남작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두 번째는 대규모 산업의 투자를 도맡아 진행한 것이다. 1890년부터 1913년까지 미국 내 주요 기업 중 42개가 그의 은행에서 파견한 직원들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들 회사 중에는 철강왕 카네기의 회사를 인수하여 탄생시킨 US스틸이나 발명왕 에디슨을 참여시켜 만든 제너럴 일렉트릭(GE, General Electric), 통신회사 AT&T 등도 있었다.


두 번의 금융위기 구제


세 번째로, 두 번의 금융위기로부터 미국을 구해냈다. 


당시 중앙은행이 없던 미국으로서는 1893년 공황(Panic of 1893)에 따른 위기와 1907년 금융 위기(Panic of 1907)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없었다.


1907년 금융위기 <출처 : 위키피디아>



이 시기에 피어폰트 모건은 자신의 신용과 추진력으로 두 번이나 미국 경제를 구해냈다.


결과적으로 중앙은행이 해야 하는 최종 대부자 역할을 수행해 낸 것이다. 물론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본인의 이익은 착실히 챙겼다.


특히 1907년 금융위기를 해결된 이후에는 그의 영향력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증가했다.


의회를 통해 미국의 세 번째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가 탄생하게  원인이 되었다.


역사적 평가


이런 피어폰트 모건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위기 대처 능력이 탁월해 정확한 판단과 추진력으로 미국의 경제를 살렸다는 평과 오직 자본에 대한 독점과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경제 권력으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했다는 평가이다.


모건의 역할을 풍자한 그림 <출처 : 위키피디아>



지지하는 쪽과 싫어하는 쪽에 따라 평가가 극명했다.


이후 미국의 금융계에서 피어폰트 모건과 같은 인물이 다시는 나오지 못했다.


시대가 변하고 금융 시스템이 바뀐 원인도 있지만, 미국의 문화적 특성이 독점적 권력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가장 큰 이유였다.


연방정부와 금융 자본의 만남


그의 시대는 금융자본이 산업계를 지배한 시기였다. 이 영향으로 미국의 제조업은 막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유럽을 넘어설 수 있었다.


미국이 제국주의 체제로 전환하면서 연방정부가 가장 먼저 손을 내민 것은 금융업계였다.


이러한 결과로 미국의 자본이 다른 나라에 투자되어 그 나라의 경제권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


JP 모건 체이스 은행 <출처 : 위키피디아>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금융이 독차지한 산업의 독점 체제를 깨려고 노력한 것도 연방정부였다. 셔먼 반독점법(Sherman Antitrust Act, 1890) 적용을 통해 대규모 트러스트를 분해한 것이다.


결국 한 손에는 칼을, 한 손에는 꽃을 들고 있었던 것이다.


연방정부의 관리감독과 금융업체의 국경을 넘나드는 투자방식은 서로 간에 보조를 맞추면서 미국이라는 나라를 키워나갔다.


1896년 제너럴 일렉트릭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이러한 밑바탕 속에서 미국의 제조업은 정상에 설 수 있었고, 제1,2차 세계대전을 통해 전 세계의 경제권을 가져올 수 있었다.


금융자본주의와 미국의 성장


피어폰트 모건이 만들어낸 금융자본주의는 미국의 성장기에 적절한 효과를 내게 해 주었고, 월스트리트가 커 나갈 수 있게 해 준 밑바탕이 되었다.


뉴욕 월스트리트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그의 이름과 그가 남긴 금융 회사는 지금도 미국 경제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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