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정엽 Apr 10. 2021

피어폰트 모건의 젊은 시절과 남북전쟁

J.P. 모건 이야기 4

피어폰트 모건의 어린 시절은 금수저의 삶이었다.


하트포드 State Street (1914년) <출처 : 위키피디아>

유복한 삶과 귀족적 분위기


집안은 유복했고, 귀족스러운 분위기였다. 미국은 귀족이 없었으나, 가문을 중시하는 문화는 강했다.


그의 집안은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된 졸부나, 자수성가하여 집안 경제력이 확 좋아진 가문과는 차원이 달랐다.


절도 있고 품위 있게 생활하는 법을 배웠다. 흡사 유럽의 귀족과도 같은 생활방식을 득하며 성장한 것이다.



조지 피바디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영국에서 미국의 채권을 판매하며 거부가 된 피바디는 어린 시절의 가난 때문에 언제나 돈을 아껴 생활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지만, 피어폰트 모건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 주니어스 스펜서 모건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북동부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자부심과 아무 경제적 걱정 없이 자라온 세월이 그들의 자신감이자 긍지였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부자였던 것이다.


이러한 심리적 안정감과 제대로 교육받은 덕분에 향후 유럽의 귀족들과 별다른 어려움 없이 교제할 수 있었다.



체셔 아카데미의 기숙사 <출처 : 위키피디아>


젊은 시절의 학업과 독일 유학


피어폰트는 11살의 나이에 하트퍼드 공립학교로 편입하여 성공회 아카데미를 졸업했다(현재 체셔 아카데미, Cheshire Academy)


이후 영국 고등학교 입학에 성공했으나, 잔병치레로 큰 고생을 했다.


특히 1852년에 생긴 류머티즘 고열로 1년 가까이 요양을 할 정도로 건강이 약해졌다. 아예 걸을 수 조차 없을 정도였다.


주니어스는 아들의 병치레를 걱정하여 스위스로 보내 그곳에서 학업을 이어가게 했다.


이후 독일의 괴팅겐대학교(University of Göttingen)에 입학하여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괴팅겐대학교 <출처 : 위키피디아>


이러한 유럽에서의 학업 수행은 향후 의 귀족들과 스스럼없이 문화적 일체감을 게 되는 원동력이 됐다.


은행업무의 시작과 경험


모건은 1857년 아버지와 피바디의 동업으로 생긴 '피바디, 모건 앤 컴퍼니(Peabody, Morgan & Co.)' 런던 지점에서 은행 업무를 시작했다.


이후 1년 뒤에 피바디 은행의 미국 대표를 맡고 있는 '던컨, 셔먼 앤 컴퍼니(Duncan, Sherman & Company)'의 은행에서 일하기 위해 뉴욕으로 건너왔다.


그는 급여를 받지 않은 상태로 일을 했다.


1857년 불황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1857년 발생된 불황(Panic of 1857)은 첫 글로벌 금융위기였다. 이때 런던에 있는 피바디 은행은 파산을 겪을 정도의 자금난을 겪었다.


이러한 모습은 아버지 주니어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아버지의 보수적 경영과 끝없는 충고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조심스럽고 보수적인 경영을 하게 됐다.


리스크가 있다고 판단되거나, 사업 내용을 잘 모르는 회사에는 절대로 투자하지 않는 성향을 보여주었다.


이런 방식은 당연히 아들인 피어폰트 모건에게도 지속적으로 충고했다.


아버지 주니어스 모건 <출처 : 위키피디아>


모건은 잔소리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지만,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은 그가 평생 가져간 유산이었다. 한 번도 아버지의 훈계를 거스르지 않았고, 절대적인 믿음을 가져갔다.


과감한 투자 방식과 교훈


피어폰트 모건은 1859년 회사의 규칙을 위반한 채 무모한 투기 행위를 벌였다.


뉴올리언스 항구에 정착된 선박 중에서 주인을 찾는 브라질산 커피를 막대한 회사 돈으로 매입, 바로 매각하여 차익을 거둔 것이다.


이 무모한 사건은 모건의 투자 성향과 성격을 단번에 보여준 것이었다.


던컨, 셔먼 앤 컴퍼니의 창립자 중 한 명인 버틀러 던컨  <출처 : 위키피디아>


비록 이익을 낸 투자였지만, 회사의 룰을 어겼다고 생각한 은행의 파트너들은 그를 조용히 내보내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참고로 던컨, 셔먼 앤 컴퍼니는 1875년에 파산했다)


아버지는  사건을 통해 충동적인 아들을 더 조심스럽고, 집중적으로 단련시켜야 한다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했다.


병역 대리 복무와 '홀 카빈 사건'


피어폰트 모건은 게티즈버그 전투(Battle of Gettysburg) 이후 연방정부에서 내려온 징집령에 직접 응하지 않았다.


돈을 주고 다른 사람을 보낸 것이다.


게티즈버그 전투 <출처 : 위키피디아>


이는 당시 부유층 자제들의 관례였다. 300달러를 주고 다른 이가 대신 병역을 수행해 준 것이다. 피어폰트는 대리인이 병역을 마칠 때까지 가족을 돌보아주었다.


이 시기 그는 주요한 사건에 휘말렸다.


일명 '홀 카빈 사건(Hall Carbine Affair)'이었다. 돈을 기 위해 발생된 사건이라기보다는, 그 답지 않은 판단력을 보여준 이었다.


이 사건의 배경은 북군의 낡은 카빈 소총의 판매로부터 시작됐다.


카빈 소총 (M1819) <출처 : 위키피디아>


군대 무기고에서 나온 5천 정의 낡은 소총을 3.5달러에 매입하여 일정 부분 손질(소총 총구에 강선을 넣음)을 하여 달 뒤에 전투 현장의 북군 장교에게 매각을 했다.


판매 가격은 개당 22달러였다. 단 세 달 만에 6배의 이익을 남긴 것이다.


모건이 담당한 것은 구식 소총 매입 시, 2만 달러(담보 2,500정)를 빌려준 것이었다.


높은 이자율을 받은 것이 화근이었다. 자금을 책임진 임무를 맡은 것은 두고두고 질타를 받았다.


전쟁을 통한 이익의 추구


나중에 모건은 소총 구입에 쓰일지 몰랐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어찌 보면 남들은 조국을 위해 피를 흘리는데 누구는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한다는 식을 갖게 해 주었다.



남북전쟁 시 연방정부가 발행한 그린백 <출처 : 위키피디아>



하지만 당시 금융가들의 생각은 전쟁을 하나의 돈벌이 수단으로 인지했기에, 별다른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다.


이러한 인식은 바다 건너 유럽의 투자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전투의 승리 여부에 따라 남부과 북부의 채권을 사고팔면서 그 차익을 챙기기에 분주했다.


전쟁은 금융가들에게 있어 재산을 늘릴 수 있는 절호의 투자 기회였다.

작가의 이전글 J.P. 모건의 역할과 영향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