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정엽 Apr 12. 2021

19세기 은행의 속성과 신디케이트

J.P. 모건 이야기 5

나이 어린 피어폰트 모건이 바라본 시대적 상황은 자본주의의 초창기와 다름없었다.


대규모 철도산업의 속성


당시 회사를 세워 경영한다는 은, 자기 가족을 중심으로 운영하는 것을 했다.


국부론을 지은 아담 스미스 <출처 : 위키피디아>


가지고 있는 토지로 담보 대출을 받아 가게를 운영하고 이를 점차 확장하는 형태였다. 사실상 대규모 자본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철도 산업은 달랐다.


상상하기 힘든 규모의 자본을 필요로 했고, 운영을 위한 자금추가로 필요했다.


종사하는 사람의 수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사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자본 투입이 필수였다.


대륙황단철도의 만남 <출처 : 위키피디아>


하지만 투자자들은 선뜻 넣을만한 기본 정보가 부족했다.


지금과 같이 회사의 재무정보를 공시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아예 허위로 장부를 작성한 사례도 부지기수였다. 이를 관리 감독할 연방정부 기관도 존재하지 않았다.


회사를 운영하는 경영진도 장부의 부실을 감추기에 급급할 정도였다.


역설적으로 유지를 위한 자금이 필요한 경영진은 외부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주도권 다툼을 보여준 '이리 전쟁' 묘사 그림 <출처 : 위키피디아>


투자자와 은행가와의 관계


결국 투자를 원하는 이와 투자를 받아야 하는 사이에서 이들을 조율한 것은 은행가였다.


이들은 투자자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회사 이사회에 참여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이를 통해 경영에 간섭하여 사업 효율성을 극대화했다.


이익을 만들어 주주들에게 배당하는 것이 최고의 목표였다. 이것을 행동으로 실천한 이가 피어폰트 모건이었다. 그의 이름은 신뢰의 상징처럼 인식됐다.


당시 유럽의 자본을 좌지우지하는 세 개의 은행이 있었다.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것이  로스차일드(The Rothschilds)였고 그다음이 베어링스 은행(Barings Bank)이었다. 마지막이 주니어스 모건은행이었다.



유럽 유대계 은행 가문인 로스차일드 가 문장  <출처 : 위키피디아>


19세기 유럽 은행의 특성


이들은 영국 런던을 중심으로 여러 국가의 실세들과 네트워크를 다지며 사업에 활용했다.


운영방식은 철저한 멤버십 중심이었다.


모르는 사람은 처음부터 경계심을 가졌고, 다른 은행이 거래하는 고객과는 계약하지 않았다. 불문율과도 같았다.


지금처럼 개인 중심의 소매 거래가 아닌, 왕족과 국가를 대상으로 거래를 했다. 이러한 모습은 은행에게 엄청난 권력을 부여한 것과 같았다.


한 나라전쟁에 참여하게 되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이때까지 선진화된 조세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국가들은 은행에서 전쟁 자금을 빌려야만 했다.


나폴레옹 전쟁  <출처 : 위키피디아>


은행가는 자기가 가진 자금을 대여해 주는 것은 물론, 부족할 경우 타 은행까지 연합한 신디케이트를 구성하여 제공해 주었다. 보편적 운영 방식이었다.


사실상 한 국가의 중앙은행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보불전쟁을 통한 주니어스 모건의 성공


피어폰트 모건의 아버지인 주니어스가 영국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보불전쟁 당시 프랑스 채권을 매입하여 판매한 영향이 가장 컸다.


프랑스 정부의 신뢰를 얻음으로써 다른 국가의 채권 매입과 판매에도 깊게 관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이때 주니어스가 프랑스 채권 판매로 벌어들인 돈은 당시 기준으로 천문학적인 150만 파운드였다)


보불전쟁  <출처 : 위키피디아>


이를 통해 늘어난 자본금은 더 큰 규모의 거래가 가능하게 만들었다. 돈이 돈을 벌어오는 것이었다.


머천트뱅크(상인은행)와 신디케이트


이처럼 하나의 머천트뱅크(Merchant bank, 상인은행)가 한 나라의 정부 조직과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은 주로 사적인 관계였기에 가능했다.


은행은 외부 감사를 받을 필요가 없었고(주식회사가 아니었다), 정치적 성향에 맞춰 여러 은행과 연합할 수 있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해 이익 중심의 커넥션이었다.


이들로 구성된 신디케이트는 혹시라도 모를 손해를 서로 나누어 가지게 되는 위험 분산 기능이 있었다. 아울러 채무자와의 협상에서도 깜짝 놀랄 정도의 교섭력을 키울 수 있는 힘도 있었다.


베어링스 은행 창립자  <출처: 위키피디아>


이러한 상황에서 은행을 무시하고 사업을 한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했다. 그만큼 은행가의 파워가 놀라울 정도였다.


피어폰트 모건의 활동


이것이 미국에서 피어폰트 모건이 강력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된 이유였다.


그는 남북전쟁 시기에 아버지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전쟁터의 상황을 수시로 전달했다.


주니어스는 빠르게 취득한 정보로 남부와 북부의 채권 가격 등락폭을 이용, 수시로 사고팔아 이익을 얻었다.


이러한 아버지와의 서신 교환은 일주일에 이틀 정도의 시간을 투자했고 그 기간은 무려 33년 동안 이어졌다.

(이 편지들은 피어폰트 모건이 죽기 몇 해전, 모두 불태워 없앴다)


젊은 시절의 피어폰트 모건 <출처 : 위키피디아>


아버지가 영국 런던에서 활동하는 동안 모건은 미국 뉴욕에서 활약했다.  


미국의 성장과 월스트리트


그는 이 무렵에 '유럽보다는 미국이 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가 될 것'이라는 믿음을 자주 내비쳤다. 그만큼 자신감이 있었고, 이를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피어폰트에게 인생의 목적이 돈은 아니었지만, 월스트리트가 영국 런던의 투자 규모를 앞지르게 하는 데 일등 공신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피어폰트 모건의 젊은 시절과 남북전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