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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Apr 14. 2021

철도 사업에 뛰어든 모건

J.P. 모건 이야기 6

피어폰트 모건이 철도사업에  손을  것은 하나의 사건에 참여하면서부터다.


'올버니-서스퀴해너 철도' 사건의 배경


일명 '올버니-서스퀴해너 철도' 사건(Albany and Susquehanna Railrold)으로 불렸다. 1869년에 발생했고 철도 회사의 경영권 장악을 위한 싸움이었다. 목적은 돈이었다.



올버니-서스퀴해너 철도 채권 <출처 : 위키피디아>



당시 뉴욕의 주식시장은 하나의 난장판이었다. 작전과 협잡이 성행했고 음모와 권모술수가 넘쳐났다.


이를 통해 거대한 부를 이룬 사람들이 생겨났는데, 흔히  로버 배런(robber baron), '강도남작'이라 불렸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대니얼 드루, 제이 굴드(Jay Gould, 1836~1892), 제임스 피스크(James Fisk, 1835~1872) 등이었다.


특히 철도의 왕이라 불린 코넬리어스 밴더빌트와 대니얼 드루, 제이 굴드가 벌인 이리 철도 주도권 싸움은 뇌물과 협박, 거짓과 폭로 등이 한꺼번에 터졌다.


언론에서 '이리 전쟁(the Erie war of 1868)'이라 부를 정도로 유명했다.


강도남작을 묘사한 그림 <출처 : 위키피디아>


'강도남작'의 선두주자 제이 굴드


이러한  '강도남작' 중 선두 주자인 제이 굴드(Jay Gould)였다. 그는 자신이 소유한 이리 철도의 확장과 함께 새로 발굴된 석탄 광산을 거머쥐기 위해 '올버니-서스퀴해너 철도' 회사 인수에 달려들었다.


하지만 방법이 문제였다.


아무도 모르게 주식을 매집하는 한편 판사를 매수하고 내부자를 포섭해 창업자를 내쫓으려 다.


당시 '올버니-서스퀴해너 철도' 회사는 규모가 작은 회사였다. 1851년에 사업을 시작했지만 운영 노선 길이도 짧았고 보유한 기차 수도 적어 사실상 거의 수익이 나지 않은 회사였다.


제이 굴드 <출처 : 위키피디아>


하지만 노선 주변에 석탄광산이 새로 발견되면서 회사 자산 가치가 상승했다. 제이 굴드가 이것을 노리고 덤벼든 것이다.


설립자 조지프 램지의 저항


회사 설립자 조지프 H. 램지(Joseph H. Ramsey)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변호사이자 뉴욕주 의회 상원의원을 역임한 쟁쟁한 인물이었다. 


치열한 법정 다툼 속에 회사 인수가 지연되자, 화가 난 굴드는 친구인 피스크를 시켜 폭력배를 동원시켰다.


램지도 이에 맞섰다.


결국 두 세력을 태운 열차양보 없이 마주 달리다 노선상에서 정면충돌하는 사태가 발생되었다. 탈선된 기차에서 내린 이들은 각목을 휘두르고  권총을 발사한 패싸움이 벌어졌다.


뉴욕주 민병대가 출동하여 이들을 해산시켰다. 조직폭력배나 다름없었다.


제임스 피스크  <출처 : 위키피디아>


결국 램지는 소송을 거쳐 이사회의 결정을 통해 경영권을 방어할 수 있었다. 이때 도움을 준 이가 피어폰트 모건이었다.


피어폰트 모건의 참여와 관계금융


모건은 승리의 대가로 수수료 대신 이사회 참여를 요구했다. 램지는 조건을 들어주었고 피어폰트는 이사회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부터 나온 용어가 관계금융(relation banking)이었다.


은행가가 기업의 경영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은행과 금융거래를 시작하는 것을 뜻했다.


이후 '올버니-서스퀴해너 철도'회사는 '델라웨어-허드슨철도(Delaware and Hudson Railway)'와 합병하여 뉴욕 주 내에서 중요한 철도회사로 올라서게 됐다.



1886년 델라웨어-허드슨철도 노선 <출처 : 위키피디아>



이후 피어폰트는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다른 철도회사 이사회에 은행 직원을 참여시켰다.


관계금융의 확대였다.


남북전쟁 이후 철도 산업의 중요성


남북전쟁 이후 철도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물류의 혁명과 함께 사람들의 삶의 질 또한 크게 개선되었다.


특히 연방정부가 철도 건설을 독려하기 위해 지급한 막대한 토지는 회사의 이익 상승에 가장 큰 요소였다.


돈이 된다는 소식에 너도나도 철도 사업에 뛰어들었고 결국 과도한 중복 투자와 부채로 휘청이기 시작했다.


경기 침체기에는 40% 가까운 철도회사가 법정관리에 들어갈 정도였다.


1865년 태평양 철도 채권 <출처 : 위키피디아>



당시 뉴욕 증권거래소에서 거래되는 주식 중에서 매매 횟수와 시가총액이 높은 것은 철도주였다. 당대 블루칩이었고, 매출액도 이에 비례할 정도였다.


하지만 빛 좋은 개살구였다. 이익은 커녕 하루하루 연명도 힘든 회사가 부지기수였다.


철도 산업과 '모거니제이션'


피어폰트 모건이 철도산업에 뛰어든 시기가 바로 이때였다.


일명  ‘모거니제이션(Morganization)'이라 불리는 정책을 시행했다. 이것은 철도 회사의 고정 비용을 줄이고 운송료를 높여 회사의 재무 구조를 튼튼히 만들어 놓은 것이다.


기존 채권자들이 보유한 채권을 이자율이 낮은 신규 채권으로 교환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자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모건의 모거니제이션 풍자 그림 <출처 : 위키피디아>



결과적으로 철도 회사가 하나둘 살아나면서, 발생된 이익으로 투자자들에게 배당을 줄 수 있었다. 피어폰트 모건은 투자자들에게 수호천사나 다름없었다.


의결권 신탁을 통한 사업 효율성 증가


모건이 철도 회사의 경영에 참여할 수 있었던 방식은 '의결권 신탁'이었다.


투자자인 대주주들의 의결권을 위임받아 5년 정도 경영권을 장악, 은행가가 회사의 구조 개선에 앞장선 것이다.


실상 은행이 회사를 직접 경영하는 식이었다. 그만큼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은행은 투자자의 이익 보호를 위해 어쩔 수 없는 방법이라고 항변했지만 독점적인 권력 행사는 사실이었다.


제이피모건 체이스 은행 <출처 : 위키피디아>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면서 1900년대에는 대부분의 철도회사가 통폐합을 거치게 되었다.


수많은 철도 회사가 월스트리트의 통제를 받는 6개의 회사로 하나둘 합쳐졌다.


은행의 세력 확대와 늘어난 이익


철도 회사의 영향력이 줄어든 만큼 은행가의 세력은 더 커졌다. 이들이 가져가는 이익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다.


이른바 금융 도를 활용한 은행이 산업 자본을 관리한 것이다. 과거의 이자수입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이익이 증가했다.


그 선두에는 피어폰트 모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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