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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모건-금융자본주의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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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Apr 18. 2021
'코르세어 동맹'과 철도 분쟁의 해결사
J.P. 모건 이야기 8
피어폰트
모건은
세
자녀의 아버지였다.
두 번의 결혼과 세 자녀
두 번째 결혼을 통해 큰 딸 루이자를 1866년에, 1867년에 피어
폰트 모건 2세(J. P. Morgan Jr., 1867~1943, 일명 잭)를 1867년에, 둘째 딸 줄리엣이 1870년에 태어났다. 나중에 셋째 딸 앤이 태어났다.
셋째 딸 앤 트레시 모건 <출처 : 위키피디아>
피어폰트의 첫사랑이자 첫 번째 아내인 아멜리아 스터지스(Amelia Sturges)는 결혼식 후 몇 달만에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피어폰트는 그녀를 평생 잊지
못해
정기적으로 그녀의 무덤을 방문하곤 했다.
반대로 두 번째 부인인 프랜시스 루이스 트레이시(Frances Louise Tracy)와는 사이가 그리 원만하지 못했다.
업무가 바쁜 것도 있었지만, 깊은 관심을 보여주지 않았다. 피어폰트 성격 자체가 워낙 강하고 말이 없었다. 그의 평생 핸디캡인 코의 피부질환도 이를 거들었다.
피어폰트 모건이 앓았던 코의 피부병과 유사한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부인과의 관계는 나이가 들수록 더 멀어졌고, 서로의 관심사에 무관심한 채 살아갔다. 형식적인 부부의 모습이었다.
아들인 잭은 이러한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메신저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극도의 사생활 보호와 '코르세어' 구입
이러한 분위기로 피어폰트 모건은 자신의 사생활을 극도로 숨겼고, 버는 만큼 소비하는 당시의 도금 시대(
Gilded Age)
의
낭비벽과도
거리가 멀었다.
도금 시대에 지어진 밴더빌트 가문의 집 <출처 : 위키피디아>
그는 품위 있고 전통적이며 고전적인 성향을 좋아했는데, 이런 모임에서도
고집 센
리더의 기질을 보여주었다.
그는 홀로 있는 시간을 좋아했고, 주로 찾은 장소는 바다였다.
당시 거부들은 주로 개인 열차를
매입 후
이용했고,
관리했다. 모건은 철도회사의 특별열차를 이용했지만 자신만의 열차를 갖지는 않았다.
대신 요트를 가졌다.
이름은 '코르세어(Corsair)'였고 1882년 매입했다. 길이가 약 50미터였고 검은색으로 뒤덮였으며, 증기 엔진이 달려있었다.
코르세어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코르세어'를 통한 정신적 해방감과 사업 활용
그는 요트를 타면서
혼자
만의 독립과 해방감을 느꼈다. 과도한 업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고, 출퇴근 시에도
자주
사용했다. 바다의 매력에 푹 빠졌다.
정신적인 압박이 강할 때면 요트를 타고 대서양의 넓은 바다로 나와 깊은 생각에 잠겼다.
때론 사업적인 목적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경쟁사의 추적을 피하거나 중요한 회의 등은 이 배에서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사건이 ‘코르세어 동맹’이었다. 이것은 자신의 배에서 이루어진 철도회사 대표 간의 업무 협약을 뜻했다.
웨스트 쇼어 철도 노선 <출처 : 위키피디아>
코르세어 동맹 사건
당시 펜실베이니아 철도(Pennsylvania Railroad)와 뉴욕 센트럴 철도(New York Central Railroad)는 웨스트 쇼어 철도(West Shore Railroad)를 놓고 치열하게 다투고 있었다.
이 웨스트
쇼어 철도는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만든 회사가 아니었다.
경쟁관계에 있는 펜실베이니아 철도회사가 뉴욕 센트럴 철도와 동일한 노선으로 웨스트
쇼어 철도를 만든 것이다. 사실상 사업적 견제 목적이었다.
이에 질세라 뉴욕 센트럴 철도 회사도 펜실베이니아 남쪽에 철로를 부설하기 시작했다.
펜실베이니아 철도 노선 <출처 : 위키피디아>
당시 철도 회사의 사업성은 두 개의 노선이 경쟁을 할 경우, 이익은 커녕 두 회사
모두 망할 정도로 수익률이 낮았다.
그렇기에 오직 한 개의 노선만이 독점적인 사업 구조를 갖고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구조였다.
두 회사의 다툼으로 웨스트 쇼어 철도는 법정관리 상태였고, 뉴욕 센트럴 철도는 매출 감소로 현금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기본적인 운행 열차와 철로의 유지 보수조차 버거울 정도였다. 비단 이 두 회사만의 철도가 이렇게 싸운 게 아니었다.
철도의 거상이라 불린 윌리엄 헨리 밴더빌트 <출처 : 위키피디아>
19세기 철도 회사의 상황
19세기 말 철도 회사는 정해진 기준이나 규칙 없이 마구잡이로 건설된 것이 분쟁의 원인이었다.
경쟁사를 죽이기 위해 적자를 감수하고 요금을 인하하는 것은 물론, 회사마다 철도의 폭도 달랐다. 다른 회사 기차가 다니지 못하게 하는 것이 이유였다. 다분히 고의적이었다.
연방정부는 이를 가만 놔둔 채 회사끼리 극한 경쟁을 하게 내버려 두었다.
두 회사의 철도
싸움
은 피어폰트 모건의 입장에서도 손해가
컸
다. 가만히 지켜본 그는 두 회사의 의사결정권자를 자신의 요트인 '코르세어'로 초청하여 만나게 했다.
프랭크 톰슨 <출처 : 위키피디아>
두 회사의 대표급 임원들은 이 사실을 모른 채 각각 다른 장소에서 승선을 했고, 상대방을 보자마자 서로 내리려고 했다. 하지만 요트는 이미 항구를 떠난 후였다.
모건의 중재와 사업적 담합
결국 대서양을
떠도는
배에서 오랜 시간 동안 옥신각신 다투던 이들은
체력적으로
지쳤다.
모건의 고집도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뉴욕 센트럴 철도의 회장인 천시 데퓨와 펜실베이니아 철도의 부회장 프랭크 톰슨(Frank Thomson,
1841~1899, 6대 회장)
은 서로 사업적 협약을 맺었다.
웨스트 쇼어 철도는 뉴욕 센트럴 철도가 인수하여 회사 규모를 확대했다.
뉴욕 센트럴 철도가 펜실베이니아 철도회사를 견제하기 위해 건설한 제방과 터널은 고속도로로 용도를 변경했다.
1876년 뉴욕 센트럴 철도 지도 <출처 : 위키피디아>
이는 두 회사가 모건의 중재를 통해 서로 간의 이익을 취한 것이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사업적 담합이지만 이 시대에는 오히려 적극 권장할만한 일이었다. 적자 회사를 흑자 회사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적극적인 사업적 담합의 추진
이 사건으로 피어폰트는 처음으로 아버지 주니어스에게 칭찬을 받았다. 그의 나이 48세였다.
이후 피어폰트 모건은 유사한
회사 간
경쟁이
발생
되면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서 사업적 이익을 취하는데 앞장섰다.
피어폰트 모건 (1902년) <출처 : 위키피디아>
모건 은행은 변호사를 선임하여 이들을 협상 과정에 투입, 회사 간의 과당 경쟁이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조정하는 업무 자체는 나쁘지 않았으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게 문제였다.
오직 원하는 결과만을 추구했기에 지금 상황과 비교해 보면 합법적이지 않은 부분도 많았다.
목적은 이익이었고, 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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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모건-금융자본주의의 시작
06
철도 사업에 뛰어든 모건
07
철도 사업의 확장과 뉴욕 센트럴 철도
08
'코르세어 동맹'과 철도 분쟁의 해결사
09
1893년 경제공황과 연방정부의 위기 극복
10
'US스틸' 설립과 거대 트러스트의 시대
J.P.모건-금융자본주의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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