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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Apr 16. 2021

철도 사업의 확장과 뉴욕 센트럴 철도

J.P. 모건 이야기 7

뉴욕 월스트리트 23번지에 유명한 건물이 있었다.


'더 코너'와 드렉셀 모건 앤 컴퍼니


'더 코너(The Corner)'라고 불린 이 곳은 피어폰트 모건이 일하던 곳이다.


더 코너(The Corner) <출처 : 위키피디아>


1873년 월스트리트와 브로드 스트리트가 만나는 모퉁이에 세워졌다. 금융 제국의 중심이라 불렸다.


수많은 기업의 대표가 방문했고, 여러 나라의 채권 판매를 협상하기 위한 장소였다.


런던의 모건 그렌펠은 주니어스가 운영했고, 이 곳은 아들인 피어폰트 모건이 운영했다.


다만 독자적인 운영이 아닌, 당대의 저명한 은행가인 드렉셀 은행과 파트너십을 맺고 활동했다.


회사 명도 '드렉셀 모건 앤 컴퍼니(Drexel, Morgan & Company, 이하 드렉셀 모건)였다.

 

앤소니 드렉셀 <출처 : 위키피디아>


앤소니 드렉셀과 드렉셀 은행


앤소니 드렉셀(Anthony Joseph Drexel, 1826~1893)은 필라델피아에서 손꼽히는 은행가였다. 


드렉셀모건 은행은 1871년 주니어스가 아들인 피어폰트 모건의 성격을 통제하고자 드렉셀에게 멘토를 부탁하여 만들어진 회사였다.


이 시기만 해도 피어폰트 모건은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다.


그의 충동적이고 앞뒤 가리지 않는 성향을 잘 알고 있는 주니어스는 아들을 통제해줄 믿을 만한 파트너로 드렉셀을 연결해 준 것이다.


참고로 드렉셀 은행은 필라델피아에서 제이 쿡(Jay Cooke, 1821~1905) 다음으로 연방정부 채권을 맡아 운영하는 회사였다.


규모도 컸고, 영향력도 높았다.

 

제이 쿡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주니어스는 런던에서 드렉셀 지점의 파트너로 참여하고 있어, 서로 간에 관계도 친밀했다.


드렉셀은 금융의 중심이 필라델피아에서 뉴욕 월스트리트로 이동하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고,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고 싶었다.


뉴욕으로의 확장은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여 주니어스의 제안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연방정부의 채권 유통


당시 드렉셀 은행의 강점은 연방정부의 채권 유통이었다. 이는 피어폰트 모건에게 새로운 수익원을 알게 해 주었다.


아울러 드렉셀 가문을 통해 워싱턴과 필라델피아의 정재계 인맥의 폭을 확장시킬 수 있었다. 이는 바로 실적으로 나타났다.


미국-멕시코 전쟁 때의 전시채권  <출처 : 위키피디아>


1873년 연방정부는 남북전쟁 발행된 채권 상환을 위해 낮은 이자율로 구성된 채권 대체 계획을 세웠다.


이를 인수하는 곳으로 드렉셀모건 은행과 제이 쿡이 달려들었다.


제이 쿡은 남북전쟁 전시 채권 판매의 최고 일인자였다. 하지만 1869년부터 북태평양 철도 사업에 뛰어든 후, 자금 경색과 자신의 명예에 흠집이 많이 난 상태였다.


북태평양 철도의 채권 1억 달러를 유통시키는 과정에서 온갖 불법과 속임수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북태평양 철도 노선 <출처 : 위키피디아>



연방정부는 두 은행에게 적절한 배분을 하려 했으나, '크레디트 모빌리에 스캔들'과 1873년 9월 제이 쿡의 파산으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한 은행으로 몰렸다.


결국 드렉셀모건 은행은 우뚝 서게 됐다.


제이 쿡의 파산과 '1873년 대불황'


참고로 '검은 목요일'로 기록되는 1873년 9월 18일에 발생된 제이 쿡의 파산은 뉴욕 증권거래소가 열흘 동안 중지될 정도로 큰 여파를 안겨줬다.


금융 시장의 혼란과 자금 경색으로 증권사 57개와 약 5천여 개의 회사가 파산을 할 정도였다.


1873년 대불황 <출처 : 위키피디아>


이것을 '1873년 대불황(Panic of 1873, Long Depression)'이라고 불렀다.


미국 철도에 투자한 유럽 투자자들도 어마어마한 손실을 봤다. 헐값에 시장에 나온 철도 채권은 나중에 미국 월스트리트가 대부분 흡수했다.


이후 피어폰트 모건은 '믿을 만한 채권을 통해 계획대로 받을 수 있는 이익'을 중심으로 은행을 운영했다. 투기 가능성이 높은 투자 자체를 싫어하게 된 것이다.


뉴욕 센트럴 철도의 대량 주식 매각


1879년 피어폰트 모건의 위상이 한차례 더 높아진 사건이 발생했다.



뉴욕 센트럴 철도 노선  <출처 : 위키피디아>


그것은 공개된 기업 중 가장 크 규모를 자랑했던 뉴욕 센트럴 철도(New York Central Railroad)의 주식인수와 유통 건이었다.


이 철도 회사의 주인은 철도왕 코넬리어스 밴더빌트였는데, 크고 작은 11개 노선을 합병해 만들었다. 사실상 거대한 철도 네트워크였다.


그의 사후 막대한 주식은 장남인 윌리엄 헨리 밴더빌트(William Henry Vanderbilt, 1821~1885)에게 상속되었다. 지분율이 자그마치 87% 였다. 뉴욕을 기점으로 한 경쟁력 높은 회사였다.



윌리엄 헨리 밴더빌트



사람들은 이처럼 중요한 회사가 개인 한 사람에게 집중된 것을 두려워했고, 뉴욕 주 의회는 회사의 불법행위를 기반으로 청문회를 열고자 했다.


매각 성공과 인지도의 상승


사실상 지분율을 낮춰 사업적 리스크를 분산시키라는 의미와 같았다. 경고였다.


결국 헨리 밴더빌트는 눈치를 채고 주식을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그 책임자로 피어폰트 모건을 선임했다.


당시 42세의 모건은 신중하게 처리했다. 자칫 소문이 나면 과다 매물로 월스트리트에 큰 부담이 될 수 있었다.


아울러 영국 투자자들은 미국 철도에 크게 혼쭐이 난 경험으로, 신뢰도가 거의 바닥이었다. 회사의 재무정보 조차 믿지 못하겠다는 의견도 있었다.


피어폰트 모건(1902년) <출처 : 위키피디아>


하지만 피어폰트 모건이 주간사로 선정되자 분위기는 돌변했다.


재계의 거부들로 중심이 되어 신디케이트가 꾸려졌고,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런던에서도 매각이 진행되었다.


결국 무사히 매각에 성공했고, 주식 시장에 끼친 충격은 미미했다.


주식 수가 자그마치 25만 주였다. 수수료로 3백만 달러를 받았다.


뉴욕 센트럴 철도 이사회 진입


모건은 이때 뉴욕 센트럴 철도의 이사회에 들어갔다. 이유는 '영국의 투자자 보호'였다. 실제로 피어폰트 모건은 투자자의 이익을 보호하는 역할에 집중했다.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의 중앙 홀  <출처 : 위키피디아>


하지만 이것을 계기로 뉴욕 센트럴 철도는 사실상 모건 은행의 철도회사가 되었다.


금융 자본이 산업 자본을 본격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한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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