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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Apr 20. 2021

1893년 경제공황과 연방정부의 위기 극복

J.P. 모건 이야기 9

피어폰트 모건이 실질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여 대중에게 각인된 계기는 1893년에 발생된 공황(Panic of 1893)때문이었다.



1893년 공황 <출처 : 위키피디아>


1893년 공황과 시대적 상황


당시 유럽의 금융 상황은 그리 좋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아르헨티나에 투자한 베어링스 은행이 큰 손해를 봤다.


미국에서는 밀의 가격이 폭락하면서 경제 침체를 우려한 사람들이 안전 수단인 금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1892년 홈스테드 파업'이 발생했었고, 1880년도부터 시작된 철도 산업의 거품도 서서히 꺼지고 있었다.


도금 시대에 부풀려진 부의 향연이 줄어들고 있었다. 서부에서는 수많은 은광산이 개발되었고, 시중에 풀린 은이 시장에 넘쳐나기 시작했다.


셔먼 은 매입 법의 주인공인 셔먼 상원의원 <출처 : 위키피디아>


결국 1890년에 제정된 셔먼 은매입법(Sherman Silver Purchase Act, 1890)으로 정기적으로 은을 매입해야 했다.


연방정부는 은의 매입대금으로 금을 지급했다. 보관된 금의 양이 계속 줄어드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만 는 상황이었다.


클리블랜드 대통령 취임과 사회적 혼란


이 시기에 금과 은의 싸움은 이어지고 있었다.


부자들은 오직  금만이 통화 수단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고 농민과 서민들은 은까지 통화 수단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은의 유통으로 소액 화폐는 시중에 풀렸으나 이를 바라보는 유럽의 투자자들은 불만이 많았다. 미국의 화폐가치 하락으로 가만히 앉아서 손해를 보는 입장이었다.


1892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그로버 클리블랜드(Stephen Grover Cleveland, 1837~1908)가 제2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클리블랜드 대통령 <출처 : 위키피디아>


경제 상황이 좋아지지 않았다.


1894 년에 벌어진 미국 하원 선거(United States House of Representatives elections, 1894)에서 공화당이 승리했고 민주당이 참패했다.


총 356석 중 민주당 93석, 공화당 253석, 인민당(People's Party, United States) 9석, 실버당 1석이었다. 민주당은 기존 대비 107석을 잃었다.



풀먼 파업 시 주 방위군의 사격 <출처 : 위키피디아>



이런저런 정치적 혼란 속에 1894년 풀먼 파업(Pullman Strike, 전국 단위의 철도 파업)은 1893년 공황의 결정판이었다.


연방군이 투입되어서야 파업이 종료될 정도로 두 달이 넘게 진행되었다. 유혈사태도 발생했다.


피어폰트 모건의 사업 투자


이런 시기에 피어폰트 모건은 '제너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 Company)'을 설립하는데 주력했다.


이 회사는 '에디슨 일렉트릭(Edison General Electric Company)'과 '톰슨 휴스턴 일렉트릭( Thomson-Houston Electric Company)'이 합병해 탄생한 회사였다.


하지만 회사는 자금 부족으로 계속 어려움에 처했고 모건은 막대한 돈을 투자했다.


결과적으로 제너럴 일렉트릭도 모건의 영향을 받는 하나의 회사가 되었다.



제너럴 일렉트릭 로고 <출처 : 위키피디아>


기술 발전을 위한 노력에도 피어폰트 모건에 대한 대중적인 인식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모거니제이션'을 거친 철도 회사들이 수익성 개선을 위해 철도 요금을 올리고 있었고, 불황의 장기화로 농산물의 유럽 수출줄어들고 있었다.


금본위제와 금은 본위제의 싸움


이 당시 금본위제를 주장하는 모건의 주장은 중서부 지역 농민들에게 큰 불만이었다. 농산물 가격의 하락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통화가치가 하락하는 인플레이션이 되어야 농산물 가격이 올라갈 수 있었고, 이는 농민들의 수입이 늘어나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기 위해서는 통화량 증대를 위해 소액 화폐인 은의 유통이 보다 더 활발해야 했다. 즉 농인들은 금과 은이 화폐로 인정받는 금은복본위제를 주장했다.


하지만 동부 은행가들은 자신들의 자산이 저절로 줄어드는 현상을 막고자 오직 금만이 화폐로 인정받는 금본위제를 강하게 밀고 있었다.


금본위제만이 유럽 은행들이 화폐가치 안정을 통해 안심하고 미국에 투자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1900년 금과 은의 싸움을 묘사 <출처 : 위키피디아>


결국 금와 은을 사이에 둔 지역적 •정치적 갈등 구조는 모건과 같은 은행가들을 흡혈귀처럼 인식하게 했다.


유럽을 위해 국가의 재산을 외국으로 팔아넘기는 매국노처럼 생각한 것이다.


와중에 1894년에도 연방정부가 소유한 금은 계속 줄어들고 있었다.


1893년 공황의 여파와 줄어드는 금 보유량


당시 미국의 경제 상황은 최악이었다.


1893년 공황으로 약 500여 개의 은행이 파산했고, 이 여파로 15,000개의 회사가 문을 닫았다. 농촌에서는 수많은 농장이 압류되었다.


무료급식소의 모습(1931년) <출처 : 위키피디아>


실업률은 자그마치 35%(뉴욕의 경우)다. 펜실베이니아 25%, 미시간주 지역은 43%를 기록했다.


파산한 이들은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을 위한 무료급식소가 생겨났다.


이러한 경제적 상황과 금, 은 본위제의 싸움 등으로 유럽 투자자들은 미국 경제를 불신했다. 경제 불황을 더 악화시켰다.


미국에 투자된 유럽의 자본매일 금으로 태환 되어 유럽으로 떠나는 배에 실려 나갔다. 언제 연방정부가 파산을 선고할지, 날짜만 기다리는 이들도 있었다.



1893년 금융공황의 묘사 <출처 : 위키피디아>



1895년 1월, 최악의 상황이 닥쳐왔다. 연방정부의 금이 바닥을 보인 것이다.


금을 확보하라!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유럽의 로스차일드(Rothschild)에게 긴급 요청을 보냈다. 연방정부 채권을 팔아 그 돈으로 금을 매입해 공급하려는 계획이었다.


유럽으로 먼저 손을 내민 이유는, 자국 내 월스트리트 은행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가 이들에게 특혜를 주었다는 인식을 주기 싫어서였다.


하지만 제안을 받은 유럽의 투자은행들은 망설였다. 채권을 인수했다가 폭락하게 되면 큰 손해를 보기 때문이었다.


결국 점점 줄어드는 금을 보면서, 피어폰트 모건이 나섰다.


그는 로스차일드 은행의 미국 대리인인 벨몬트(August Belmont Sr.,1813~1890)와 함께 직접 대통령과 재무부 장관을 만나 설득했다.


로스차일드의 미국 대리인 벨몬트 <출처 : 위키피디아>



하지만 사모 방식(소수의 투자자들 자금을 모아 매입하는 것)의 채권을 발행해 금을 사야 한다는 모건의 제안은 의회에서 부결이 났다. 


위기는 하루하루 다가왔다.


피어폰트 모건의 활약과 금융 위기 해결


국가 파산을 며칠 앞두고, 대통령과 피어폰트 모건이 직접 만났다.


모건은 과감한 제안을 했다.


의회의 동의가 필요 없는 연방정부의 긴급 채권을 발행하면, 자신이 직접 채권을 팔아주겠다는 것이었다. 금액은 6,500만 달러(만기 30년)였다.



미국 재무부 건물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결국 대통령의 재가를 받은 이 채권은 피어폰트 모건이 보증을 서서 유럽의 투자자들에게 매각이 됐다.


1895년 2월에 금을 조달하기 위해 특별 발행된 채권은 미국에서는 1시간 만에, 유럽에서는 2시간 만에 모두 매진되었다.


채권이 모두 판매되고, 그 돈으로 매입한 금이 미국으로 온다는 소식으로 금융시장은 안정세를 되찾았다.


피어폰트 모건의 신용으로 미국의 위기는 해소된 것이다.


신디케이트 형태로 채권 매입에 참여한 은행은 재판매를 통해 짭짤한 수익을 올렸고, 모건이 챙긴 수수료는 약 5퍼센트 내외였다.


로스차일드 은행 <출처 : 위키피디아>


여론의 반발과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의 등장


이후 신문을 통해 이 소식이 알려지자 시민들의 극심한 반발이 일어났다. 채권의 헐값 매각으로 은행가들의 배만 불려주었다는 얘기였다.


퓰리처(Joseph Pulitzer, 1847~1911)가 소유한  <뉴욕 월드>는 '모건은 고리대금업자'라는 기사를 실었다. 하지만 반대로 <뉴욕타임스>는 '모건 같은 파수꾼이 없었다면, 미국은 파산했을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내용은 결국 클리블랜드 대통령의 입지를 좁혀 놓았다.


결국 1896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 1860~1925) 이 대통령 후보로 당선되는 이변을 낳았다.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출처 : 위키피디아>


당시 피어폰트 모건이 가진 생각은 시민들이 생각하는 내용과 달랐다.


피어폰트 모건의 독점 우선주의


그는 자신의 이익이 곧 국가의 이익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의 희생으로 미국의 위기를 구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생각은 독점 사업은 거대 기업을 만들 수 있고, 이를 통해 반복 투자나 출혈 경쟁 없이 모두에게 이익이 발생된다고 생각한 이었다.



피어폰트 모건 (1903년) <출처 : 위키피디아>



그것만이 미국을 부강한 국가로 만들 수 있고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지름길이란 의미였다.


지금 경제 구조와는 맞지 않는, 당시의 논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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