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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Apr 22. 2021

'US스틸' 설립과 거대 트러스트의 시대

J.P. 모건 이야기 10

1900년이 되면서 20세기가 시작되었다.


미국 자본주의와 트러스트


19세기 동안 진행된 경제의 변화는 본격적인 산업화의 시대를 알렸다. '자본주의'라는 단어가 탄생했고, 금융가들의 힘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였다.


미국은 기술과 교통의 발달로 경제 시장이 변화됐다. 수많은 지역별 운영 방식에서 통합적 규모를 가진 하나의 시장으로 좁혀진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 맞춰 기업들은 치열한 인수합병을 거치면서 덩치를 키워나갔다. 1897년 약 70건의 인수합병이 2년 뒤에는 1,200건으로 그 수가 폭증했다.


규모가 커진 기업들은 '트러스트'를 조직해 자신들의 왕국을 만들어 갔다.


미국-스페인 전쟁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아울러 '미국-스페인 전쟁(Spanish-American War, 1898)'의 승리로 자국 내 시장을 넘어서 외국으로 시선을 넓혔다.


이런 과정에서 은행가들의 영향력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은행가의 영향력과 피어폰트 모건의 위상


당시 트러스트는 가족이 소유했거나 몇몇 가문이 모여 구성을 이룬 경우가 많았다. 은행은 트러스트 생성 과정에 참여하여 대금의 결제 및 보증에 참여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신용과 공정함이었다. 정확한 가격 산출을 해야 했고, 정해진 기간에 대금을 지불해야 했다.


이 시기에 피어폰트 모건의 이름은 신뢰의 대명사였다.


그가 참여한 거래는 손해가 없었고, 원하는 가격을 받을 수 있었으며, 정확한 일정을 준수했다.


특히 대규모 인수합병을 진행하는 데 있어, 그가 처리하지 못하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대표적인 사건이 'US스틸(U.S. Steel, United States Steel Corporation'의 설립이었다.


펜실베이니아 US스틸 타워 <출처 : 위키피디아>



당시 피어폰트 모건이 참여한 페더럴 스틸(Federal Steel Company)과 카네기의 카네기 철강(Carnegie Steel Company)은 서로 경쟁관계에 있었다.


철강 산업의 재편 모색


제조산업의 이익이 커지면서, 철강 산업의 참여자가 늘어났다. 철도산업처럼 과다 경쟁으로 서로 제살 깎아먹기 경쟁이 일어나전이었다.


젊은 나이에 카네기 철강 회장이 된 찰스 슈왑(Charles M. Schwab, 1862~1939)이 주선한 만찬에서, 피어폰트 모건은 좋은 아이디어를 제공받았다.


철강왕 카네기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철강회사가 모여 하나의 거대한 트러스트가 만들어진다면, 원가 절감뿐만 아니라 전 세계 철강 시장을 지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모건은 결심을 굳힌 후 강력한 추진력으로 이 사업을 실행했다.


카네기에게 그의 철강회사를 매입한 것은 물론, 경쟁업체를 윽박지르고 회유하면서 추가적인 합병을 진행해 나갔다.


거대 기업 'US스틸'의 탄생


결국 1901년 2월, 사상 유래가 없는 엄청난 규모의 자본금을 바탕으로  앨버트 게리(Elbert Henry Gary, 1846~1927),  윌리엄 무어(William Henry Moore, 1848~1923) 등과 함께 'US스틸'을 탄생시켰다.



엘버크 게리 <출처 : 위키피디아>



본사는 뉴욕시 71번 브로드웨이(Broadway)에 있는 엠파이어 빌딩(Empire Building)이었다.


100만 달러의 규모에도 입이 떡 벌어지는 시절에, 14억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기업이었다.


규모의 채권과 주식을 유통해본 경험이 없는 회사들은 신디케이트를 조직, 300여 개의 금융회사가 참여하였다.


이것은 자본주의 시대를 맞아 금융과 산업이 결합된 초유의 사건이었다.


당시 카네기는 회사 주식의 남발을 우려하여 채권으로 매각 대금을 받았고 모건 은행에서 네 명의 직원이 이사회에 참여하게 됐다. 당시 이 회사는 미국 내 철강 생산의 약 70%를 차지했다.



US스틸 로고 <출처 : 위키피디아>


막대한 주식 발행과 유통 등으로 초기 설립에 참여한 회사 관계자들은 일약 돈방석에 앉았다.


모건의 추진력과 사업자 간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거대한 철강 트러스트가 탄생한 것이다.


철도 트러스트의 탄생


얼마 후 대규모의 철도 트러스트가 생겨났다.


일명 '노던 시큐러티스(Northern Securities Company)'였다.


발단은 1901년에 발생된 '노던 퍼시픽 철도(Northern Pacific Railway) 주식 매집 사건’이었다.



에드워드 해리먼 <출처 : 위키피디아>



시작은 1885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피어폰트 모건은 규모가 큰 철도 회사인 유니온 퍼시픽 철도(Union Pacific Railroad)를 파산한 채 놔두고 있었다.


얼마 후 철도 사업으로 잔뼈가 굵은 에드워드 해리먼(Edward Henry Harriman, 1848~1909)이 파산한 '유니온 퍼시픽 철도(Union Pacific Railroad)'와 자신이 운영하던 '서던 퍼시픽 운송회사(Southern Pacific Transportation Company)'를 합병해 버렸다.


모건이 신경을 못 쓰는 사이에 일을 진행해 버렸다. 이로써 남서부 지역의 철도를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는데 유대계 은행인 군 롭(Kuhn, Loeb & Company)의 지원을 받았다.


유대계 은행가 제이콥 쉬프 <출처 : 위키피디아>


유대계 은행가 제이콥 쉬프


이 뒤에는 독일 유대계 은행가인 제이콥 쉬프(Jacob Henry Schiff, 1847~1920)가 있었다.


제이콥 쉬프는 모건처럼 철도 회사 구조조정으로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모건의 뒤를 이을 정도의 규모였다.


피어폰트가 영국 자본을 중심으로 움직였다면, 군 롭은 프랑스와 독일 자본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들도 철도회사의 합병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북서부 지역의 철도 거물인 제임스 힐(James Jerome Hill, 1838~1916)이 중서부 지역의 철도를 탐내면서 시작됐다.


철도 거물 제임스 힐과의 한판 승부


그는 모건의 도움을 받아 '그레이트 노던 철도(Great Northern Railway)'와 '노던 퍼시픽 철도(Northern Pacific Railway)'를 합병해 대규모 철도 제국을 만들어 본 경험이 있었다.



제임스 힐 <출처 : 위키피디아>


힐은 '시카고-벌링턴-퀸시 철도(Chicago, Burlington and Quincy Railroad)'를 인수하여 '뉴욕 센트럴 철도'와 연결, 거대한 철도 왕국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 계획이 진행되면 해리먼은 그동안 힘들게 벌인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판이었다. 자신의 지리적 이점을 상실하게 된 그는 이 인수를 포기해 달라고 힐에게 요청했으나, 단칼에 거절당했다.


이에 화가 난 해리먼은 질 수 없다는 생각으로 군 롭과 손을 잡고 비밀리에 힐의 '노던 퍼시픽 철도' 주식을 매집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노던 퍼시픽 철도'를 인수하여 모건에게 제대로 한방 먹이기로 작정했다.



1900년경 노던 퍼시픽 철도 노선  <출처 : 위키피디아>



그만큼 자본력과 자신감이 넘쳤다.


이 사실을 모르는 모건 측은 뒤늦게 우연한 사건으로 이 내용을 알게 되었고, 바로 경영권 방어에 들어갔다. 서로 주식 매집에 불이 붙었다. 유통 주식 수는 한정되어 있어 주가가 단기간에 폭등했다.


이런 상황을 모르고 공매도를 남발한 주식 중계인들은 뒤늦게 상황을 파악, 아 뜨거라 하며 상환할 주식 매입에 뛰어들었다.


중계인들로 아수라장이 된 주식 시장에서, 모건 측이 간신히 경영권 방어에 성공했다.


경쟁 중단과 '노던 시큐러티스' 탄생


이후 극단적인 공격이 오고 갔으나 결국 양 측은 경쟁을 포기하고 서로 합의하기로 약속했다.


주식 시장의 붕괴를 막고자 공매도를 친 중계인들에게 주당 150달러에 매입하는 조건을 제시했다. 이후 주식 시장이 안정세로 돌아섰다.


피어폰트 모건과 제이콥 쉬프는 '노던 시큐러티스'라는 트러스트를 만들었다. 이 회사가 '노던 퍼시픽 철도'와 '그레이트 노던 철도', '시카고-벌링턴-퀸시 철도'를 운영하기로 합의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출처 : 위키피디아>



이 회사는 이후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1858~1919) 대통령에 의해 '셔먼 반독점법 (Sherman Antitrust Act , 1890)'으로 제소되어 결국 법원의 최종 판결로 해체되는 운명을 맞게 된다.


거대 자본과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시민들은 'US스틸'에 이어 '노던 시큐러티스'의 설립을 보면서 거대 자본의 위력에 두려움을 느꼈다.


은행가들이 벌이는 행각으로 자신의 경제적 여건이 좌지우지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결국 사람들의 염원을 지원받은 연방정부와 이를 사수하려는 금융가와의 한판 다툼은 필연적으로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포문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으로부터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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