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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Apr 24. 2021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과 트러스트

J.P. 모건 이야기 11

미국의 유명한 금용 역사학자이자 시사평론가인 론 처노(Ron Chernow)는 피어폰트 모건이 활약하던 시기를 ‘귀족 자본가 시대’라고 불렀다.


귀족 자본가를  풍자한 그림 <출처 : 위키피디아>


귀족 자본가 시대의 피어폰트 모건


그것은 막대한 자본을 필요로 한 철도와 중화학 공업 시대에 이것을 뒷받침해 준 금융가들, 즉 자본을 공급하는 이들을 지칭한 말이었다.


산업의 급격한 성장에 비해 자본의 규모는 미약했는데  이러한 부족한 자본을 공급한 중간다리 역할을 수행한 은행가들을 뜻했다. 


막대한 자본 공급으로 발생된 이익은 엄청났고, 이에 더해 감독 기관의 역할까지 수행했다. 연방정부 이상의 권력을 휘둘렀다.


회사의 소유권 자체가 은행으로 넘어가는 경우도 비일비재해서, 금융과 산업의 경계가 애매모호한 경우도 많았다.


존 피어폰트 모건(1902년) <출처 : 위키피디아>


이 중에서 가장 꼭대기에 있는 인물이 피어폰트 모건이었고 그의 거래 방식에 따라 사람들이 움직였다.


철도 산업과 모거니제이션


하지만 그는 오직 만을 쫓진 않았다. 독선적이었으나 공정한 거래방식을 선호했고 신용을 중요시 여겼다.


파산한 철도회사의 재구조화를 거쳐 살려낸 것을 '모거니제이션(Morganization)'이라 불렀는데, 그의 은행인 모건 하우스가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철도 회사의 전체 규모 중 20% 정도가 이에 해당됐다. 이들의 매출액 규모는 연방정부 연간 예산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피어폰트 모건을 풍자한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사람들의 눈에 비친 것은 이들이 휘두른 권력에 의해 경제가 흔들리는 것이었다. 금융을 통해 사회 전체영향력이 좌지우지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매킨리 대통령의 암살과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취임


대표적인 사건이 1901년에 발생된 '노던 퍼시픽 철도 주식 매집 사건’이었다.


비록 경쟁하던 두 회사의 제휴로 사건은 마무리되었으나 주식 시장에 발생된 혼란으로 다시 금융공황이 오는 게 아닌가 할 정도로 주식 중계인들의 공포는 대단했다.


1901년 9월, 산업계와 금융계에 우호적이었던 월리엄 매킨리(William McKinley, Jr., 1843~1901) 대통령이 사망했다.


매킨리 대통령 암살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그는 금융가들이 활개 치는 모습을 모른 체할 정도로 그들의 편에 서 있었다. 이런 그가 무정부주의자인 레온 출고즈(Leon Czolgosz, 1873~1901)라는 사람에게 암살당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피어폰트 모건의 인생에 변화가 생겼다. 새로운 대통령인 루스벨트와의 갈등이 시작된 것이다.


매킨리 대통령의 뒤를 이어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1858~1919)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되었다.


루스벨트는 별칭이 테디(Teddy)였고. 테오도어, 테오도르 루스벨트라고도 불렸다. 제26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출처 : 위키피디아>


그는 1898년에 발발된 미국-스페인 전쟁 때 민병대를 조직, 직접 전투에 참여할 정도로 적극적인 사람이었고 뉴욕 주지사를 역임했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경력


대통령에 취임했을 무렵의 나이는 40대 초반이었다.


그는 공화당 이면서 독특하게 혁신주의를 주장했고 독과점 철폐와 트러스트의 문제점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특히 노조와 회사 간의 갈등에 적극 개입하여 장기간에 걸친 노사문제 해결에 노력했다.


1902년 석탄 파업의 중재 <출처 : 위키피디아>


그의 재임 시절에 연방정부와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시켜 회사와 노조 양측을 동시에 통제하기도 했다.


루스벨트는 1906년에 모로코 문제 중재와 러일전쟁을 종식시키는 데 기여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인물이었다.


이런 그에게 피어폰트 모건의 존재는 연방정부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으로 인식되었고, '노던 퍼시픽 철도 주식 매집 사건’으로 탄생한 철도 트러스트인 노던 시큐러티스(Northern Securities Co.)를 강하게 견제했다.



셔먼 반독점법을 만든 존 셔먼 상원의원 <출처 : 위키피디아>


결국 1902년 당시 법무장관인 필랜더 C. 녹스(Philander Chase Knox 1853~1921)를 시켜 셔먼 반독점법(Sherman Antitrust Act) 위반으로 법원에 기소했다. 대중의 불만을 눈치챈 대통령이 먼저 선수를 친 것이다.


트러스트 파괴자


이후 7년 동안 미국 내 산업분야를 독점하던 43개의 독과기업이 제소되었다. 이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붙은 별명이 '트러스트 파괴자'였다.


하지만 피어폰트 모건은 함부로 대들지 못했다. 조용히 이를 지켜보았다. 강하게 항의를 하긴 했지만, 연방정부에 맞설 정도의 바보는 아니었다.


트러스트 파괴자 루스벨트 <출처 : History.Com >



두 사람의 의견 차이는 극명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거대한 독점 기업이 커지는 만큼 연방정부의 권한도 커져야 한다고 믿었다.


모건은 트러스트 견제 장치는 모두 다 쓸데없고 기업 자율로 맡겨 두는 것이 사업적 효율성을 추구하는데 더 유리하다는 생각이었다.


이런 그의 생각은 귀족자본가 시대에 적합한 인식이었으나 루스벨트 대통령의 생각은 이와 달랐던 것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실리주의


그렇다고 루스벨트가 무조건 금융가들을 싫어한 것은 아니었다.



파나마 독립 지원 <출처 : 위키피디아>


미국 국내에서는 시민들의 여론을 염두에 두고 반독점 행위를 강하게 제한했으나, 국제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는 철저히 금융가를 지원했다.


이런 결과로 탄생한 나라가 파마나였다.


콜롬비아로부터 독립을 할 수 있게끔 자금 지원을 진행한 이는 피어폰트 모건이었고 뒤를 지켜준 것은 루스벨트였다.


그 결과 파나마 운하가 완공되어 미국의 이익을 가져올 수 있었다.


1904년 대통령 선거 <출처 : 위키피디아>


둘의 협력관계는 겉으로 드러나 보이지는 않았다.


1904년 대통령 선거에 뛰어든 루스벨트를 위해 모건은 당시로는 꽤 큰 금액인 15만 달러를 기부했다.


둘은 출신부터 부유했고 남에게 지기 싫어한다는 공통점을 가진 것으로 보아, 어찌 보면 서로에게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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