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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Apr 26. 2021

타이타닉호와 해운 트러스트의 실패

J.P. 모건 이야기 12

승승장구하던 피어폰트 모건에게도 크나큰 실패의 사건이 있었다.


해운 트러스트 IMM의 설립


그것은 해운 트러스트인 '인터내셔널 머컨타일 마린(International Mercantile Marine, 이후 IMM으로 표기)'이었다.


타이타닉호(1912) <출처 : 위키피디아>


불안 불안하던 회사가 결정타를 맞은 것은 1912년 신규 여객선인 타이타닉호의 침몰이었다. 이 소식을 75번째 생일 전날에 듣게 된 모건은 큰 충격과 실의에 빠졌고, 결국 1914년에는 자금 지급이 불가능할 정도로 회사 사정이 악화되었다.


피어폰트 모건의 야심 찬 계획


1901년 US스틸의 성공으로 철도 트러스트와 철강 트러스트를 움켜 쥔 모건은 다시 한번 야심 찬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해운 트러스트였다.


인터내셔널 머컨타일 마린 우선주 <출처 : 위키피디아>


대서양을 오가는 해운업을 장악한다면, 자신이 구축한 철도망을 통해 미국의 상품을 유럽에 무제한으로 수출할 수 있을 것이란 계획이었다.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모건은 1902년 10월, 드디어 IMM을 조직했다. 이 회사는 미국인이 소유권과 운영권의 지분을 대부분 소유하고 있었다.


사실상 지주회사 격이었다. 


각각의 해운 사업체를 운영하는 회사는 독자적인 운영이 가능했지만 전체적인 경영 방향은 지주회사가 통제하는 방식이었다.


IMM의 대표 피어폰트 모건 <출처 : 위키피디아>


당시 해운 운송업은 철도업과 마찬가지로 시장이 포화상태였다.


해운업의 상황과 열악한 수익 구조


엄청난 가격 할인 공세와 너무도 많은 의 운항으로 사실상 수익이 나지 않았다.


이에 독일 해운계에서 내로라하는 회사들까지  이 좁은 국제 시장에 뛰어들었다. 한마디로 교통정리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꾸준히 증가하는 미국 이민자들을 실어 나르는 박과 부호층을 겨냥한 호화판 대서양 여행 프로그램, 수출이 증가하면서 규모가 성장하고 있는 북대서양 화물 운송까지,  피어폰트 모건의 구미를 당길만한 요소들은 충분했다.


자신이 나서면 이 혼탁한 시장도 정리될 것이란 자신감도 한 몫했다.



대형 선박의 중앙 단면도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하지만 모건의 IMM 설립은 영국 정부의 경계심을 불러왔다.


영국의 경계와 독일 해운사의 참여


가뜩이나 경제의 주도권을 미국으로 넘겨주고 있는 상황에서, 해운업이 주력이었던 영국에게 자국의 주요 산업을 지켜야 한다는 불안감을 가져다준 것이다.


모건은 이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주도하에 영국의 해운회사까지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부르스 이스메이 <출처 : 위키피디아>


당시 최대 여객선 업체인 영국의 화이트 스타 라인(White Star Line)을 매입, IMM에 포함시켰다. 


이 회사의 CEO였던 부르스 이스메이(Joseph Bruce Ismay, 1862~1937)를 IMM의 회장으로 임명했다.


IMM는 총 120척 규모의 배를 소유하게  되었고 당시 민간으로서는 최대 규모의 해운회사로 올라섰다. 프랑스가 보유한 상선 수보다 많았을 정도였다.


이에 더해 독일의 해운 운송업계 대부인 '함부르크-아메리카 라인(HAPAG, Hamburg America Line)'까지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이 회사의 회장인 알베르트 발린(Albert Ballin,1857~1918)은 횡제인 빌헬름 2세를 알현하고 모건과의 연대를 직접 브리핑까지 할 정도였다.



알베르트 발린 탄생 100주년 기념우표 <출처 : 위키피디아>



이런 다양한 사업적 내용들은 영국의 경계심을 한층 더 자극했다. 영국 정부는 자국의 대형 선박 회사인 브리티시 큐나드 라인(Cunard Line)을 지키기로 결정했다.


큐나드 라인의 불참과 치열한 경쟁


모건과 알베르트 발린은 큐나드 라인이 빠진 IMM은 이빨 빠진 호랑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 정부의 보조금 지급까지 받게 된  큐나드 라인은 모건의 제안과 협박을 거절했다. 결국 독자 생존의 길을 가기로 했다.


영국을 대표하는 해운사와 미국을 대표하는 해운사와의 치열한 가격 인하 경쟁이 시작되었다.


원가 이하의 서비스 제공은 폭발적인 적자 증가로 이어졌고 자본력의 한계에 몰린 IMM은 최후의 승부수를 띄우게 다.


영국의 큐나드 라인에 대항하기 위해 거대한 여객선 두 척을 건조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큐나드 라인 로고 <출처 : 위키피디아>


그 배가 바로 화이트 스타 소속의 타이타닉호(RMS Titanic)와 올림픽호(RMS  Olympic)였다.


당시 IMM의 회사 상황은 최악이었다. 회사 설립 후 발행된 채권은 4년이 지난 1906년까지 80%가 팔리지 않은 상태였다.


빨리 자본금을 확충하기 위해 무언가 대중의 시선을 확 잡아당길 만한 뉴스와 실적이 필요했고 그 과정에서 나온 것이 타이타닉호였다.


더구나 경쟁사인 큐나드 라인은 영국 정부의 보조금을 받으면서 세계 최대 규모의 선박인 모리타니아호(RMS Mauretania)와 루시타니아호(RMS Lusitania)를 건조하고 있었다.


큐나드 라인의 루시타니아호 <출처 : 위키피디아>


타이타닉호의 침몰과 IMM의 몰락


하지만 IMM의 초호화 유람선인 타이타닉호(RMS Titanic)는 대대적인 홍보를 뒤로 한채 첫 항해에 빙산과 충돌, 침몰하고 말았다.


당시 피어폰트 모건이 이 배를 타기로 되어 있었으나 어떤 연유인지 참석을 하지 못했고, 이 내용은 한동안 여론의 좋은 먹잇감이 되기도 했다.  


프랑스 온천 휴양지에서 이 소식을 들은 피어폰트 모건은 큰 충격을 받게 되고, 전 세계의 거센 비판이 IMM과 그에게로 쏟아졌다.


피어폰트 모건은 자신이 살아났다는 안도감보다는, 알고 지내던 수많은 지인은 물론, 숱한 사람들이 차디찬 바닷속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이는 그의 체력과 정신력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결국 IMM은 1914년 지급불능 사태에 빠지게 되고 모건의 아들인 잭 모건에 의해 1916년 채권자들에게 손해 배상이 이루어졌다.


타이타닉호의 침몰 <출처 : 위키피디아>


이후 IMM 은 일련의 인수 및 합병을 거쳐 1943년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라인(United States Lines)'으로 다시 태어나게 됐다.


IMM 사건은 피어폰트 모건의 대표적인 실패작으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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