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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Apr 28. 2021

피어폰트 모건의 죽음과 연방준비제도의 탄생

J.P. 모건 이야기 13

1907년의 시작은 조용했다.


피어폰트 모건은 거의 은퇴를 한 상황이었다. 직접 지시를 내리기보다는 주요 사항을 보고 받거나 이런저런 의견만 전달하는 시절이었다.


1907년 공황 당시 월스트리트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1907년 금융공황


1907년 공황(Panic of 1907)의 시작은 신탁회사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은행과 다른 구조를 가진 신탁회사는 일반 은행에서는 취급이 불가능한 개인 유산과 부동산을 전문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하지만 감독기관이 없던 시절의 신탁회사는 무법천지였다.


부실한 회사의 주식과 채권을 담보로 엄청난 대출을 해 주고 있었다. 게다가 일시적 자금 인출에 대비한 현금 보유량도 턱없이 부족했다.  


뱅커스 신탁의 벤자민 스트롱 <출처 : 위키피디아>



당시 이러한 위험성을 안고 있는 신탁회사의 구조에 대해 모건은 불평을 쏟아냈지만, 별다른 방법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충복을 이용, 공동 출자 방식으로 뱅커스 신탁(Bankers Trust)을 설립했다. 고객의 요청이 있을 경우, 신탁회사와 자신의 은행을 소개하여 서로 예금과 대출을 연결시킨 구조였다.


1907년 10월, 구리 광산 주가의 급락으로 광산의 주식을 대량으로 보유한 신탁회사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니커보커 신탁회사  <출처 : 위키피디아>


니커보커 신탁회사의 파산과 뱅크런


특히 '유나이티드 코퍼(United Copper Company)'라는 회사의 주식 작전이 실패로 끝나면서 니커보커 신탁회사(Knickerbocker Trust)의 회장인 찰스 T. 바니(Charles T. Barney, 1851~1907)가 연루되었다는 소식은 불난 집에 휘발유를 부은 격이었다.


불안감에 쌓인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가 예금을 인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명 대량 예금인출인 뱅크런이었다.


얼마 후 찰스 바니는 자살했고, 니커보커 신탁은 10월 22일 파산했다.


찰스 T. 바니 <출처 : 위키피디아>


신탁회사의 파산은 월스트리트에 대규모 불안감을 던져 주었고 미친 듯이 몰려드는 사람들로 금융시장이 마비될 지경이었다.


예금 인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려드는 신탁회사들로 콜금리가 폭등했다. 결국 신탁회사에서 무더기로 쏟아지는 주식으로 증권거래소가 중단되다시피 했다.


피어폰트 모건의 활약과 위기 해결


이 소식을 들은 모건은 급히 은행가들을 회동, 긴급 자금을 투입했다.


당시 미국에는 중앙은행이 없었고 사실상 모건이 이 역할을 담당했다. 뉴욕의 사태에 유럽도 깜짝 놀라 서둘러 투자금 회수에 나섰다.


뉴욕 증권거래소 모습(1908년) <출처 : 위키피디아>


감기에 걸려 몸이 정상이 아니었던 모건은 칠순의 나이에도 감기약을 입에 달다시피 하고 금융시장 안정화에 주력했다.


 한 곳이 진정되면 다른 곳에서 문제를 발생시켰다.


특히 뉴욕주의 파산이 임박했다는 소식에 모건의 필사적인 노력과 신속성으로 자금을 공급해서 뉴욕시 구제에 성공했다.


마지막 해결을 위해 모건의 도서관에 모인 은행장들은 최후 자금이 모일 때까지 문을 열지 않겠다는 모건의 고집과 협박으로 꼼짝할 수 없었다.


결국 극적인 합의를 이뤄내면서 대규모 자금 공급이 이루어졌다.


1907년 금융공황은 모건의 신용과 능력으로 극복해 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모건 도서관 건물(2006년) <출처 : 위키피디아>


하지만 본인의 이익도 철저히 챙겼다.


모건의 최절정기와 푸조 위원회 조사


특히 증권사 무어앤슐레이사(Moore & Schley)를 구제하면서 테네시 석탄 철광 회사(Tennessee Coal, Iron and Railroad Company, TC & I)의 주식을 저렴하게 매입할 수 있었다.


반독점에 대한 법률 위반 건으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문제가 없다'는 사전 승인을 받기도 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최절정기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었다.


하지만 위기가 끝나자마자 모건의 노력보다는 그가 벌어들인 돈과 특혜에 대해 언론이 공격을 시작했다.


1912년 민주당의 윌슨 대통령이 당선되었고, 금융 개혁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머니 트러스트(Money Trust)'라는 별명도 얻었다.


이후 의회의 조사를 받게 되었다. 일명 '푸조위원회(Pujo Committee)'였다.


새뮤얼 운터마이어 <출처 : 위키피디아>


당시 담당 책임자겸 조사자는 유대인 변호사 출신인 새뮤얼 운터마이어(Samuel Untermyer, 1858~1940)였다. 그는 모건에 대한 감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늙은 몸을 이끌고 직접 청문회장에 출석한 피어폰트 모건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질문 속에 자신의 생각과 신념을 과감 없이 답변했다.


피어폰트 모건의 죽음


결국 별다른 소득 없이 위원회는 마무리되었지만 모건 하우스의 산업 지배력에 대한 내용은 공개되었다.


당시 미국의  거대 트러스트 수는 대략 78개였는데 이중의 상당수가 모건의 은행을 통해 자금을 조달했음이 밝혀졌다.


피어폰트 모건과 록펠러의 트러스트 구조 <출처 : 위키피디아>



아울러 피어폰트 모건을 비롯, 파트너들은 대기업 112개 에서 이사회에 참여 가능한 이사 72개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른바 관계금융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위원회가 끝나고 지친 육신과 정신을 스리기 위해 모건은 가족들과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고 이탈리아 로마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시신은 미국으로 돌아와 모건 도서관에 안치되었고 장례식은 세인트 조지 교회에서 거행되었다.



피어폰트 모건의 묘지 <출처 : 위키피디아>



그의 죽음으로 한 시대의 금융 시대가 끝났음을 보여주었다. 우연히도 그가 죽은 해에 세 번째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가 시작되었다.


세 번째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의 탄생


연방준비제도는 1907년 금융 공황 당시 모건의 역할에 대해 수많은 질문을 안겨주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모건의 사후, 누가 다시 이러한 일을 해 낼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서 시작된 것이 공화당 상원의원 넬슨 W. 알드리치(Nelson Wilmarth Aldrich, 1841~1915)에 의해 발의된 1908년 '올드리치-브릴랜드 통화법(Aldrich–Vreeland Act. 일명 국립은행유통법)'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중앙은행 설립에 대한 행동이 진행되었다.


넬슨 W. 알드리치 <출처 : 위키피디아>


수많은 의견과 고비 속에 의회와 연방정부, 월스트리트의 의견을 받아 1913년 카터 글라스 의원 안이 최종 통과되었고, 당시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 1856~1924)은 연방준비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지금의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eral Reserve System, 일명 연준)가 탄생되었다. 참고로 연준(fed)은 연방정부 기관이 아닌, 민간 은행들이 설립한 은행이다.


워싱턴 DC의 에클스 빌딩. 연방준비제도의 본부 역할을 수행한다  <출처 : 위키피디아>


모건의 사후 다시는 그와 같은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이 나타나지 못했다.


그는 귀족자본가 시대의 대표적인 은행가였고, 미국을 주 무대로 하여 산업의 밑바탕이 된 자본을 공급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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