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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채권②험난한 전쟁비용의 조달

1. 신생 국가는 어떻게 빚을 갚을 것인가?

by 한정엽

독립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식민지 사람들은 넘치는 의지와 불타는 투지로 모든 것을 다 이겨낼 줄 알았다.


하지만 이 생각이 얼마나 순진했던 것인지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독립선언서를 제출하는 5인의 대표자 <출처 : 위키피디아>


험난한 독립전쟁의 비용 마련


가진 돈이 없던 것은 당연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시간이 갈수록 돈이 모아지지 않았던 것이다.


전쟁을 시작한 13개 식민지에서 강제로 세금을 걷을 수가 없었고 합법적인 정부가 아닌 이유로 자체적인 수입도 없는 상태였다.


군수품 구입은 고사하고 전쟁터에서 목숨을 건 군인들이 밥을 굶는 사태까지 발생할 정도였다.


반대로 영국군은 중앙은행인 잉글랜드 은행의 국채 발행으로 막대한 자금의 동원이 가능해 군비 조달에는 걱정이 없었다.


영국의 중앙은행인 잉글랜드 은행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세계 최강의 해군력도 보유하고 있어 전쟁터가 미국 대륙이라는 지리적 불리함을 제외하고는 경제력과 자본력에서 명백한 차이가 나는 싸움이었다.


대륙 군은 가지고 있는 모든 자원을 총동원해야만 했고 이것저것 상황을 가릴 처지가 못 되었다.


일단 전쟁을 이겨야 했기에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극단적인 방법도 동원했다.


콘티넨털 지폐의 과도한 발행


가장 먼저 대륙회의의 이름으로 자체적인 지폐를 발행해 조달했다.


1776년 콘티넨털 지폐 <출처 : 위키피디아>



일명 대륙 화폐(Continentals, 이후 콘티넨털)라 불린 이 종이 지폐는 총 2억 4천만 달러 어치나 발행되었다.


당시 지폐는 금으로 교환이 된다는 전제 조건이 붙어야만 그 가치를 인정받은 시기였다. 콘티넨털은 금으로 교환이 되지 않은 불태환 지폐였다.


당연히 발행되는 순간부터 신용도가 떨어진 상태였는데, 더 큰 문제는 너무도 많은 양이 발급된 것이다.


결국 발행된 액면가의 10%까지 떨어져 거래되기도 했다.



1779년 55달러의 콘티넨털 지폐 <출처 : 위키피디아>


하락하는 지폐 가치와 경제적 혼란


믿지 못하는 지폐는 물건 가격 상승을 불러왔고 1775~78년에 물가가 2배 이상 올랐다. 이후 3년 동안에는 자그마치 10배 가까이 폭등해 사실상 화폐라 부르기 민망할 정도였다.


결국 콘티넨털은 전쟁이 끝날 무렵 액면가의 2.5% 까지 떨어져 거의 무용지물이 되다시피 했는데 ‘아무 가치가 없다’는 뜻의 숙어인 ‘As worthless as a Continental’(콘티넨털 지폐처럼 가치 없는)는 여기서 생겨난 숙어였다.


이는 독립 후 인플레이션을 유발해 엄청난 경제적 혼란을 가져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영국군은 대륙 군의 경제적 혼란을 가중시키고자, 위조지폐를 만들어 뿌려 댔다.


당시 인쇄술은 식민지보다 영국이 더 한수 위였기에 어느 게 진짜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1779년 1달러 지폐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당연히 콘티넨털에 갖는 극심한 불안감과 불신은 쉽게 잦아들지 않았고 오히려 영국 군대가 식민지 내에서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 내놓은 파운드가 인기가 올라갈 정도였다.


외국에서의 차관 도입과 무기 구입


두 번째 방식은 유럽 국가로부터의 차관(외국 정부나 공적 기관으로부터 자금을 빌려 옴)을 도입했다.


대상 국가는 프랑스와 네덜란드였고, 이 돈으로 대륙 군이 사용할 무기와 탄약을 사 들였다.


유럽은 극도로 취약해진 식민지 경제 구조를 알고 있어 대륙회의에서 발행한 지폐(콘티넨털)를 믿지 않았다.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은 화폐(파운드)나 금, 은을 줘야 무기를 판매했다.



1779년 80달러 지폐 뒷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결국 이들 국가의 차관으로 군수품을 마련할 수 있었다.


힘들게 얻어온 차관은 대륙회의 명의의 채권을 발행하여 정기적으로 이자를 지불하고 차후 원금을 조금씩 상환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전쟁에 참가한 군인에게는 차용증을 발행해 주었는데 사실상 급여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전쟁이 길어질수록 차용증도 남발되어 가격이 할인된 채 유통되어 기피 현상이 심각해졌다.


콘티넨털과 똑같은 길을 걸은 것이다.


왼쪽 두 번째가 대륙 군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내부적 혼란과 시스템 부족


이러한 어려움에 더해 내부 혼란도 한몫했다.


전쟁의 병참을 직접 운영해본 경험이 없어 행정적 비효율과 혼란은 물론 한몫 챙기자는 부정부패도 발생했다.


관리감독은 물론 금융에 대한 전문가가 턱없이 부족해 자금 운영의 체계적인 시스템도 없었다.


필라델피아 상인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가 자신의 신용으로 800만 달러라는 거금을 동원해 지원했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로버트 모리스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그는 독립 후 초대 재무부 장관으로 취임해 달라는 워싱턴의 요청을 개인 사업에 집중하겠다는 핑계로 정중히 거절했는데, 구멍 난 곳을 메꾸는데 너무도 지쳐 버렸던 것이다.


로버트 모리스와 알렉산더 해밀턴


그는 독립전쟁 중(1781년)에 조지 워싱턴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금의 재정 문제는 헤라클레스나 해결할 수 있을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다. 재정 상태가 완벽할 정도로 엉망진창이기 때문’이라는 표현을 보여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을 겪기도 했다.



독립전쟁 당시의 해밀턴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대신 모리스가 추천한 사람은 알렉산더 해밀턴이었다. 그는 독립전쟁 중에 해밀턴의 능력을 직접 검증했고 인정했던 것이다.


해밀턴은 혼란스러운 독립 국가의 경제 상황을 직접 해결하고자 워싱턴 대통령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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