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전쟁 채권④북군의 전쟁비용을 마련하라!

2. 서민들의 자본주의가 시작되었다.

by 한정엽

우리에게 민족의 수난인 한국전쟁이 있었다면 미국에게는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이 있다.


남부와 북부의 갈등으로 발생된 이 전쟁의 이유는 극심한 노예제도의 폐지여부 였다.


1790년 버지니아 농장의 노예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노예제도의 갈등과 링컨 대통령 당선


노예제를 지지하는 남부와 이를 폐지하려는 북부의 갈등 속에 1860년 제16대 대통령 선거가 진행됐다. 노예제를 반대하는 공화당의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이 당선되면서 남부가 연방을 이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7개의 주가 연방을 탈퇴했고 이후 4개 주가 추가로 참여하면서 총 11개 주가 자신들의 정부인 남부 연합(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을 만들었다.


초대 대통령으로 제퍼슨 데이비스(Jefferson Finis Davis)를 선출했다. 하나의 나라에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선 것이다.


북부는 남부를 살살 달래면서 분열이 일어나지 않기를 원했지만, 1861년 4월 남부 연합의 군대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섬터 요새를 공격하면서 전쟁이 시작됐다.


섬터 요새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남북전쟁의 발발과 북부의 오판


전쟁 초기에 북부는 남부가 어리석은 일을 벌였다고 생각했다.


당시 북부의 경제력은 남부를 압도하고 있었는데 제조업의 차이는 물론 생산력과 인구수(북부 2,100만 명, 남부 900만 명)도 비교가 안 되었다.


당연히 북부의 승리를 점치는 사람이 많았다. 무모한 남부의 도발은 북부의 대포 소리에 곧바로 전쟁을 포기할 줄 알았지만 남부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바로 전 세계를 장악하고 있는 면화와 이를 구입해야 하는 영국의 은밀한 지원, 역전의 고위 장교 출신들이 포진되어 있는 군대였다.


남부연합의 로버트 리 사령관 <출처 : 위키피디아>



로버트 리(Robert Edward Lee)라는 걸출한 장군이 남부에 있었던 반면 북부는 훈련을 받지 못한 군인과 탁월한 리더가 부족했다.


남부의 연전연승과 늘어나는 전쟁 비용


남부의 예상이 맞았던 걸까? 전쟁 초기부터 예상을 뒤엎고 남부 연합은 연전연승했고 북부 군이 한없이 밀리는 형국이었다.



1862년 전투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북부의 고위 군 지휘관들은 명성에 비해 야전에서의 실력이 부족했다. 결국 단기간에 전쟁이 끝이 날 것이라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지속됐다.


전쟁은 경제력(자금)이 뒷받침되어야만 유지될 수 있었다.


남북전쟁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매일 투입되는 전쟁 비용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폭증했고 남부와 북부 모두 돈에 허덕였다.


경제력이 월등한 북부라고는 하지만 전쟁 전부터 시작된 불황이 연방정부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막대한 비용이 투입된 앤티텀 전투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재정상태가 적자(당시 부채는 약 6,500만 달러였다)이다 보니, 써야 할 돈이 정해져 있어 군인들 월급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북부와 남부의 전쟁 비용 마련 방식


사실상 전쟁을 오래 유지할 처지가 못 되었다.


남부는 전쟁 초기 대규모 면화 농장만 믿고 있었다. 남부에서 나온 질 좋은 목화를 유럽에 팔아 전쟁 비용을 마련한다는 계획이었다.


당시 남부의 면화는 미국의 핵심 수출품이었다. 더구나 전쟁으로 인한 면화 수입 감소로 자국의 면직 산업 침체를 우려한 영국과 프랑스는 은근히 남부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남부 면화 왕을 풍자한 그림 < 출처 : 위키피디아>



북부의 재무부 장관인 체이서(Salmon Portland Chase)는 초기에 전쟁이 오래가지 않아 당분간 관세수입 만으로 필요한 비용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전투가 시작되자 예상은 바로 깨졌다.


연방정부의 적자로 겨우겨우 단기 차입으로 버티던 와중에, 전쟁이 터지자 하루하루 써야 할 돈이 급격하게 치솟았던 것이다.


체이서 장관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초기 예상했던 관세수입만으로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링컨 대통령을 앞세우고 뉴욕의 은행가들에게 전쟁 자금을 빌리러 갔다.


하지만 너무도 높은 금리(24%~36%)를 내세우는 그들의 주장을 들어줄 수 없었다. 이들의 요구 조건을 수용하고 돈을 빌리게 되면 국가의 미래가 은행가에게 넘어갈 판이었다.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일어섰다.


체이서 장관의 전쟁 비용 해결 방법


하지만 당장 눈앞에 닥친 엄청난 비용 청구서를 승인해야 했고 이를 해결한 방법을 고심 끝에 만들어 냈다.


세 가지 방법이었다.


그린백 1달러짜리 모습. 뒷면의 색상이 녹색이라 그린 백이라 불렸다 <출처 : 위키피디아>


가장 먼저 연방정부의 명의로 그린백(Greenbacks) 지폐를 발행해 비용 지급에 사용하였다.


두 번째로 개인에게 최초의 소득세를 징수해 세수를 늘렸다.


마지막으로 대규모 전쟁 채권을 발행해 국민들로부터 자금을 끌어 모았다.


전쟁 채권 판매 방식의 도입


이중 세 번째 방법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북부가 승리할 수 있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남부도 이를 벤치마킹해 면화를 주요 담보로 동일한 방식의 전쟁 채권을 만들어 유럽에 판매했다.


하지만 북부의 해군이 남부 연안을 포위하면서 면화 수출이 중단되었고 담보를 상실한 남부 채권은 폭락했다.



남부 해안을 봉쇄한 북군의 아나콘다 작전 <출처 : 위키피디아>



남부의 전쟁 자금은 사실상 끝이 난 것이다.


북부의 채권 판매 성공과 남부의 실패는 전투력의 차이를 불러왔고 이는 전쟁의 승패는 돈으로 좌우된다는 고전적 진리를 다시금 깨닫게 해 주었다.

keyword
이전 04화전쟁 채권③ 해밀턴의 해법, ‘국가 신용을 회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