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석유파동으로 인플레이션이 극심했던 1979년에, 제39대 대통령 카터는 극단적인 결심을 하게 된다.
악명 높은 물가 상승을 잡기 위해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에 폴 볼커(Paul Volcker)를 임명한 것이다.
볼 볼커의 금리 인상 정책
결과적으로 보면, 볼커 의장은 이전 의장과 달리 뚝심 있는 정책을 꾸준히 밀고 나가 물가를 잡는 데 성공한다.
여기에는 그의 급격한 금리 인상 정책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제39대 미국 카터 대통령 <출처 : 위키피디아>
70년대 초부터 진행된 물가상승은 전쟁 상황을 제외하고는 너무도 급격히 올라가는 상황이었다. 이러다 대통령 재선이 물 건너갈 것을 염려한 카터는 결국 폴 볼커를 통해 경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승부수를 띄운 것이다.
제12대 연방준비제도(일명 연준) 의장이 된 폴 볼커는 고물가에 허덕이는 미국 경제를 살리기 위해 나날이 늘어나는 실업자수 증가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정책인 금리 인상을 본격적으로 실행했다.
짧은 기간 내 급격하게 올라간 연준의 재할인율은 연관된 금융기관의 금리도 연쇄적으로 상승시켰다.
폴 볼커의 초상 <출처 : 위키피디아>
아우성치는 채무자와 늘어나는 실업자
이 상황에서 은행에 빚을 진 채무자들은 갑작스레 폭등한 대출이자로 죽어나갈 정도였다. 반대로 채권자들은 늘어나는 이자 수입으로 찢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볼커의 등장 이후 1980년대 초반의 금리가 연 20퍼센트를 넘을 정도였다. 전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다는 미국 연방정부 20년 채권도 금리가 15.8퍼센트까지 올라갔다.
결국 전 세계는 물론 수많은 돈이 은행으로 몰렸고 시중에는 고금리에 죽겠다는 아우성이 흘러 넘칠 정도였다. 기업들도 높은 이자율을 감당하지 못해 설비 투자가 주춤거리면서 수익성이 악화되었다. 주가도 급락하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 고금리에 불만에 가득 찬 국민들의 아우성이 카터 대통령에게 집중되었지만, 정작 정책의 주인공인 볼커는 이 상황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출처 : 위키피디아>
레이건 대통령의 당선과 새로운 경제정책
결국 불안한 상황 속에 1980년 대통령 선거가 진행되었고, 민주당의 카터 대통령은 정권을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Ronald Wilson Reagan)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1981년 1월, 제40대 대통령에 취임한 레이건은 볼커를 그대로 연준 의장에 유임시켰고 고금리 정책은 흔들리지 않은 채 유지되어 진행되었다.
이런 모습은 금융권에도 바로 나타났다.
은행의 예금 이자로 지급해야 할 금리가 치솟자 이와 연동된 대출 금리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갔다.
그래도 예대마진(대출로 들어온 수입에서 예금 이자 지급으로 나간 지출을 뺀 차액) 차가 커서 은행들은 수익성이 좋았다.
연방기금 금리 그래프. 1980년대 그래프가 치솟았다 <출처 : 위키피디아>
하지만 저축대부조합들은 죽을 맛이었다.
저축대부조합의 적자 확대와 함께 찾아온 파산 경고
자신들이 지급할 수 있는 예금 이자율은 4.7~5.5퍼센트 사이인데 일반 금융기관의 예금 이자율은 10~20퍼센트 사이였다.
당연히 고객들은 저축대부조합에서 돈을 빼 이자율이 높은 은행으로 예금을 갈아타기 시작했다.
이러한 예금 인출 증가는 저축대부조합의 자금 원천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았다.
당시 저축대부조합의 대출 금리는 연방정부의 규제로 인해 20년 내지 30년 만기의 초장기 고정금리로 운용되고 있어 사실상 수익성이 좋지 못했다.
워낙 길고 긴 장기로 대출이 진행되었고, 규제로 인해 고정금리로 묶인 바람에 다름 금융기관에서 발생하는 금리 인상의 효과를 전혀 볼 수 없었다. 오히려 예금 인출로 계속 자산이 줄어들고 있었다.
한마디로 단기조달 • 장기 운용(borrow short, lending long)의 영업적 특징을 갖고 있었고 규제란 규제는 모두 안고 있었다.
임기 초 세금 감면법안을 설명하는 레이건 대통령 <출처 : 위키피디아>
저축대부조합의 근본적인 문제점
더구나 단기자금을 조달하여 장기로 대출을 운용하는 사업의 성격 상, 단기간에 오른 예금 이자율로 인해 역마진이 발생된 상황이었다.
저축대부조합을 믿고 예금을 넣어 준 고객에게 지급해야 할 이자 금액이 폭등하면서 역금리 손실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자율이 상승한 이후, 신규 모기지 대출은 변동된 고금리를 적용할 수 있었으나 과거에 대출이 적용된 모기지는 고정금리로 묶여 있어, 평균 대출금리가 시장의 기준금리보다 훨씬 낮게 적용되었던 것이다.
1980년대 원유와 인플레이션 그래프 <출처 : 위키피디아>
저축대부조합의 예대마진이 적자로 돌아서기 시작했고, 짧은 기간 내 손실이 눈덩이만큼 불어났다. 이런 상황이 조금 더 지속되면 조만간 대부분의 저축대부조합이 당장 문을 닫고 파산을 해야 할 판이었다.
나날이 늘어나는 손실의 확대에 따른 파산 위험성
이전까지는 장기적인 흑자로 안정적인 운영을 해 왔으나 너무도 급격히 올라버린 금리로 과거의 이익이 단번에 날아가 버렸다.
1981년에 46억 달러, 82년에는 41억 달러의 손실이 발생했다.
1980년 3,993개의 저축대부조합 중 부실조합수는 43개였다. 그러나 1982년이 되자 3,287개의 조합 중 415개가 부실로 판명될 정도로 그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1982년에는 저축대부조합의 80% 이상이 손해를 보고 있었다. 이러다가 조합 대부분이 파산할 판이었다.
저축대부조합의 감소 < 출처 : 뉴욕타임스>
하지만 이런 상황과 달리 심각한 경제 문제였던 인플레이션은 서서히 잡혀가고 있었다.
1980년 13.5퍼센트까지 올랐던 인플레이션은 1981년에 10퍼센트, 1982년에는 6.2퍼센트까지 내려온 것이다. 결국 볼커의 금리 인상 강공 정책이 성공한 것이다.
점차 회복하는 경제와 금리 인하의 시작
이제 서서히 금리가 내려오는 일만 남았다.
변화된 상황에 기업들의 대출 규모가 크게 늘어나면서 투자가 증가했고 주식 시장도 서서히 기지개를 켜면서 상승하기 시작했다. 사실상 불황이 끝나가고 있었다.
경제회복 프로그램을 설명하는 레이건 <출처 : 위키피디아>
이러한 갈등과 고민의 시기에 레이건 정부는 저축대부조합의 상황을 지켜보면서 특단의 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여기서 나온 정책이 이후 저축대부조합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