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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Jun 12. 2020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과  뉴딜정책

미국 경제 역사 이야기 51

미국 제32대 대통령으로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1945)가 취임했다.


그의 눈앞에는 대공황이라는 감당하기 어려운 숙제가 있었지만, 특유의 쾌활한 성격으로 받아들였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New Deal)


그의 경제 방향은 유명한 '뉴딜정책'이었다.


아울러 사람들의 심리적인 마음을 위로하고자 '노변담화(fireside chat)'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정책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했다(총 30회를 진행했다).


루스벨트와 후버 대통령 <출처 : 위키피디아>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이다(The only thing we have to fear is fear itself)”라고 말했다.


과거에 없던 과감하고 혁신적인 정책을 설명했다. 효과가 나타났다. 급격한 예금 대량 인출 사태가 중단되고 오히려 예금이 늘어나는 현상이 발생했다.


뉴딜(New Deal) 정책은 흔히 ‘3R’로 불린다. 개혁(Reform), 부흥(Recovery), 구제(Relief)였다.

연방정부의 정책 진행 시 통제 강화, 지출 확대를 통한 실업자 구제, 국민들에 대한 광범위한 복지 제공이었다.


연방정부가 가진 모든 역량을 경제 정책에 투입, 적극 개입하여 경제를 살리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의회는 대통령에게 과거 누구도 가지지 못했던 권력을 부여했다.


1차 뉴딜 정책


뉴딜정책의 진행 시기는 2가지로 나눠진다.


경제 정책을 위한 법을 제도화하고 집행하는 방식의 1차 뉴딜과 연방정부 재정 정책을 중심으로 한 2차 뉴딜이다.


1차 뉴딜은 과감한 법의 도입과 집행이었다.


취임 직후 확산되던 은행의 도산을 막기 위해 강제 은행 휴일(bank holiday)을 선포했고 ‘긴급은행법(Emergency Banking Act)’을 의회에 제출해 통과시켰다.


1930년 12월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은행 파산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부실은행을 정리하고 우량한 은행은 연방자금을 통해 재정을 지원해 주는 것이었다. 은행에 대한 신뢰도가 회복되었다.


금의 태환과 수출을 중지시켜 금본위제를 정지시켰다. 돈의 인출이 줄어들고 은행 예금으로 다시 돌아왔다.


3월에 긴급은행법, 경제법, 미국 민간 자원 보존법이 승인되었다. 4월에는 모든 금화를 재무부로 일원화하여 개인의 금 소유를 금지시켰다. 금본위제 폐지를 의미했다.


5월에 연방 긴급 구호법(실직자 구호 기금 5억 달러), 농업 조정법(농촌 모기지 지원 및 농산물 과다 생산 방지를 통한 안정화),  테네시 계곡 개발 공사의 설립 승인, 연방 증권법(Securities Act of 1933, 최초의 증권업 규제 법안)을 승인했다.


6월에 국가 고용법(실직자 구직활동 지원), 주택 소유자 재융자 법, 글래스-스티걸 법(Banking Act of 1933, 일명 은행법, 금융의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농촌 신용 대부법, 긴급 철도 수송법, 미국 산업 부흥법(The National Industrial Recovery Act, 미국 산업부흥국이 창설됨)이 승인되었다.


1936년 실직 가족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글래스-스티걸 법은 미국 금융 역사상 놀라운 법이었다.


모든 은행은 상업은행과 투자은행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J.P. 모건 은행도 투자은행을 분리해 모건스탠리(Morgan Stanley)로 독립했다.


아울러 상업은행의 예금 2,500달러까지 예금자 보험으로 지급이 보장되었다(얼마 후 한도가 5,000달러로 증액됨)


이를 위해 ‘연방예금보험공사(The Federal Deposit Insurance Corporation)’ 가 발족되었다. 이 정책은 지금도 사용되는 예금자 보호법의 시작이었다.



연방예금보험공사 로고  <출처 : 위키피디아>


연방준비제도 내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Federal Open Market Committee)를 설치했다. 시장의 자금 상황을 관리할 수 있는 통화금융 정책 권한을 부여했다.


1934년에는 ‘증권거래법(Securities Exchange Act of 1934)’이 승인되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Securities and Exchange Commission)를 설립하여 증권 규제를 강화시켰다.


이러한 단기간의 규제와 강력한 정책으로 경제는 일순간 살아났다.


달러의 가치가 평가절하되어 가격이 낮아진 미국 제품의 수출이 증가했다. 아울러 통화량이 늘어나고 금리가 하락되어 경기 회복의 발판을 마련했다.


WPA (공공사업진흥국) 포스터  <출처 : 위키피디아>



2차 뉴딜 정책


1935년에 ‘2차 뉴딜’ 정책을 진행했다.


은행의 2차 개혁, 공공사업 진행을 위한 노동 프로그램의 확장, 개인의 고소득과 상속 재산에 대한 소득세율 인상(Revenue Act of 1935)이 있었다.


가장 중요한 정책 중 하나인 '전국 노동 관계법(National Labor Relations Act of 1935)'과 '사회 보장법(Social Security Act of 1935)'이 1935년에 통과되었다.



사회보장을 알리는 포스터  <출처 : 위키피디아>


'전국 노동 관계법'은 일명 '와그너 법(Wagner Act)'이라고 불린다. 근로자가 단체 협상의 권리를 가지고 고용자와 급여, 근로 조건 등에 관해 협상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이에 더해 1938년에는 '공정노동기준법(Fair Labor Standards Act of 1938)'이 진행되었다.


주 최대 44시간 근로와 최저 임금 보장(시간당 25 센트), 16세 미만 아동의 노동 금지, 18세 미만 아동의 위험한 업무 제외였다. 남부에서만  근로 시간이 130만 시간이 줄어들었고 30만 명의 임금이 올라가는 효과를 가져왔다.  


'사회보장법'의 시행


'사회 보장법'은 2차 뉴딜에서 가장 중요한 정책이었다.


기존 12개 주에서 '노령 보험법'이 있었으나 유명무실했다. 1930년대까지 현대화된 나라 중에 국가 사회 보장 제도가 없는 유일한 나라는 미국이었다.


대공황 당시 무료 급식소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이 법은 사회보장 성격의 퇴직연금, 실업 보험 및 복리 후생 제도를 법과 제도를 통해 확립한 것이다. 1937년에는 '주택법(Housing Act of 1937)'이 통과됐다.


일반적인 뉴딜 정책은 단순히 연방정부의 정을 쏟아부어 경제를 되살리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다. 하지만 근본은 그렇지 않았다.


셀 수 없이 많았던 기존 경제 정책과 비교하면, 가장 큰 차이점은 사람 존중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다. 인간이 겪는 고통 중 하나인 '빈곤'을 극복하는 것에 기준이 잡혔다는 뜻이다.


가장 근본적인 권리를 존중해 줌으로써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역할을 지원해 주었다.


이런 정책의 특수성으로 뉴딜 정책이 특별한 조명을 받는 이유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경제의 효율성보다 사람을 가장 먼저 생각했고, 정책의 최우선 기준으로 삼았던 것이다.


사회보장법에 승인하는 루스벨트 대통령  <출처 : 위키피디아>


뉴딜 정책의 완성


1938년 경제가 일시 회복되었으나 여전히 실업률은 높았다. 부족한 점을 해결해 준 것은 전쟁이었다.


2차 세계대전의 발발 후 미국 경제는 그동안 잠재되어 있던 산업의 생산력이 폭발했다. 이는 2차 세계대전 승리의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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