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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Jun 11. 2020

대공황(Great Depression)

미국 경제 역사 이야기 50

미국 경제 역사에서 가장 큰 공황인 대공황은 1929년 시작되었다.


후버 대통령의 취임과 월스트리트의 대폭락


기존의 공황이나 금융 위기보다 효과가 크고 회복 기간도 오래 걸려 ‘대공황’이라는 명칭이 붙게 됐다.


1927년부터 28년까지 미국 경제와 주식시장은 호황의 연속이었다. 자동차 생산량은 연간 10% 이상씩 상승하고 있었고 주가지수는 멈추는 법을 몰랐다.



허버트 후버(Herbert Clark Hoover) 대통령  <출처 : 위키피디아>


1928년 11월 대통령 선거에서 제31대 대통령으로 허버트 후버(Herbert Clark Hoover, 1874~1964)가 당선된 날, 축하하듯 거래량은 폭발했다.


사람들은 주식을 사기 위해 돈을 누가 더 많이 빌릴 수 있는지 경쟁할 정도였다. 나라 전체가 온통 장밋빛 환상에 빠져 있었다.


벤저민 스트롱의 죽음 이후, 이러한 경제적 분위기에 대해 누구도 신경을 쓰지 못했다. 1929년 연준은 과열된 경기를 잡고자 금리를 꾸준히 올리고 있었다.


 대공황의 시작은 1929년 월스트리트의 대폭락((Wall Street Crash of 1929)에서 시작됐다.



월스트리트의 대폭락  <출처 : 위키피디아>


이는 1929년 10월 말에 발행된 주가 폭락 사건이다. 10월 24일 목요일(검은 목요일)부터 29일 화요일(검은 화요일)까지 발생한 뉴욕 주식시장의 붕괴를 말한다.


주가 하락으로 마진론 상환 압박을 받은 주식들이 다시 쏟아졌다. 하락을 부채질했다. 자금의 홍수를 일으켜 유동성을 급히 제공했어야 했다. 스토롱이 없는 연준은 움직이지 않았다.


은행의 공황


주식시장의 붕괴로 시작된 금융권의 여파는 바로 은행권으로 넘어갔다.


아메리칸 유니언 은행 풍경  <출처 : 위키피디아>


시중에 자금이 부족해지자 마음이 불안한 사람들은 은행으로 몰려가 예금을 찾기 시작했다(이때는 예금자 보호법이 없어, 은행이 파산하면 저축한 돈을 모두 날리게 됐다)


예금 대량 인출을 감당하지 못한 은행들은 고금리로 자금을 융통하려 했으나 이마저 여의치 않았다. 결국 파산 대열에 동참했다.


1929년에 파산한 은행의 수는 660여 개였다. 뉴욕 연방준비은행은 금리를 3.5%로 낮추고 연방정부 채권을 매입해 유동성 공급을 시작했다.


이것으로는 부족했다.


후버 대통령은 재정 균형을 맞추는 것에 신경을 쓰고 있어, 추가적인 공급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앤드루 멜런(Andrew Mellon) 사진 좌측 <출처 : 위키피디아>


당시 금융재벌이자 재무부 장관인 앤드루 멜런(Andrew Mellon, 1855~1937)은 낙관적인 분위기로 공황이 빨리 정리될 것으로 예견했다. 그러나 이 예견은 커다란 오판이었음을 나중에 알게 됐다.


스무트-홀리 관세법


1930년에 후버 대통령은 본인의 과거 경력(상무장관 출신)과 맞지 않은 정책 실패를 진행했다. '스무트-홀리 관세법(Smoot–Hawley Tariff Act)'이 통과된 것이다.


이 법은 농부들이 겪고 있는 경제적인 고통을 덜어줄 목적이었다. 외국 수입품의 관세를 대폭 올리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무역 상대국 보복 관세의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법안이 진행될 당시, 천여 명의 경제학자가 후버 대통령에게 거부권을 강하게 요청하는 서명 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1930년 6월 후버 대통령은 이 법안에 최종 서명을 했다. 재무부 장관(앤드루 앨런)도 반대하지 않았다. 법이 실행 되자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대공황 당시 모습<출처 : 위키피디아>


2년여에 걸쳐 각국의 보복 관세가 부과되었다. 미국의 수출이 급격히 감소했다. 1929년 52억 달러의 수출이 1932년에 21억 달러로 규모가 61%나 줄어들었다.


실업률의 증가와 은행의 파산


본격적인 대공황의 피해가 발생했다.


경제의 기본 척도인 실업률은 1930년 말 11.9%에 달했다. 1931년에 15%, 1932년에는 자그마치 23%에 이르면서 경제는 계속 악화되었다.


문제는 경제적 어려움을 이기지 못해 자살하는 사람이 속출한 것이다. 빈곤의 해결이 가장 필요한 시기였다.


은행이 파산하는 숫자도 매년 신기록을 경신했다. 1930년에 1,352개의 은행이 사라졌다. 11월과 12월에 문을 닫은 은행만 608개였다.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준 사건은 이해 12월에 발생한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은행(Bank of United States)의 파산이었다. 상당히 규모가 큰 은행이었고, 약 45만 명의 예금주가 소매상과 의류업에 종사하고 있는 유대인이었다.


이 은행의 파산은 더 큰 불안과 공포를 가져왔다.


다시 한번 대규모 예금인출 사태가 벌어졌다. 1930년부터 1933년 사이 약 11,000개의 은행이 문을 닫았다. 전체 은행의 약 40%에 해당했다. 통화 공급은 약 30%나 줄었다.



후버 빌(Hooverville)  <출처 : 위키피디아>


통화량 감소로 기업이 넘어지면서 연방정부의 세 수입도 크게 줄어들었다. 은행의 파산과 실업자의 증가로 경제는 악화되었다. 사람들의 생활수준은 바닥까지 내려갔다.


유행했던 용어 중에 '후버 빌(Hooverville)'은 판자촌과 노숙자 야영지를, '후버 가죽(Hoover leather)'은 구멍 난 신발 밑창에 덧대어 쓰는 골판지를 뜻했다. '후버 담요(Hoover blanket)'는 몸을 덮고 자는 신문지를 말했다.


유럽의 위기와 루스벨트의 등장


바다 건너 유럽에서도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1931년 독일 다나트 은행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1931년 5월에 오스트리아 최대 은행인 크레디트 안살트(Creditanstalt)가 파산을 했다. 7월에는 독일의 가장 큰 은행인 다나트 은행(Danat bank)이 무너졌다.


이 여파로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수많은 은행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차 대전의 배상금 지급은 고사하고, 독일 경제가 빠르게 붕괴하기 시작했다. 이후 초인플레이션과 히틀러의 등장으로 독일은 나치즘(Nazism)이 자리 잡았다.


1932년 대통령 선거를 앞에 두고 민주당 후보 루스벨트는 대공황의 책임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후버는 이에 받아치는 형태로 정치 공방이 벌어졌다.


1932년 대통령 선거 결과  <출처 : 위키피디아>


이러한 악조건에도 금본위제 고수를 위해 연준은 1932년 10월부터 다시 금리를 올렸다. 경제 상황은 더 악화되었고 사람들의 비명조차 들리지 않았다.


대통령 선거에서 루스벨트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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