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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Jul 26. 2020

엘리자베스 스카일러 해밀턴 1

알렉산더 해밀턴의 부인

 

엘리자베스 스카일러(Elizabeth Schuyler Hamilton, 1757~1854)는 해밀턴의 부인이다.


박애주의자 엘리자베스 스카일러


현재까지 해밀턴의 역사적 자료가 많이 남아있는 것은 전적으로 엘리자베스의 노력과 헌신이었다. 


그녀는 일평생 해밀턴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함께 사랑을 평생 동안 소중히 간직한 것으로 유명하다.


젊은 시절의 엘리자베스 <출처 : 위키피디아>



그녀는 해밀턴의 죽음 이후 50년을 더 살았지만 한순간도 쉬지 않고 자신 보다는 가족과 타인을 위해 헌신했다.


대표적인 예로, 뉴욕시 최초의 개인 고아원인 그레이엄 윈덤(Graham Windham)의 공동 창립자(1806년)였다. 부회장 및 회장, 이사장을 역임하며 죽기 얼마전까지 봉사했다.


그녀는 고아의 복지 시설 향상을 위해 평생 노력했고, 42년간 이 사회복지기관을 위해 헌신했다.


때문에 그녀를 나타내는 수식어에는 항상 ‘박애주의자’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다.



그레이엄 윈덤 초창기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아버지 필립 존 스카일러


그녀는 뉴욕에서 부유하고 정치적 영향력이 높았던 ‘필립 존 스카일러(Philip John Schuyler, 1733~1804)’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당시 아버지는 네덜란드계 미국 명문가 가문의 지주 중 한 명이었다.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1799) 가족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필립은 대륙회의 대표 중 한 명 이기도 했다.


엘리자베스는 부유한 집안의 자녀로 태어났지만, 일평생 사치와 허영보다는 자기 절제와 겸손한 태도를 유지했다.


필립 존 스카일러   <출처 : 위키피디아>


어린 시절 무척 말괄량이였다고 전해지나, 강인한 믿음과 굳건한 의지력은 평생 그녀를 지탱해 준 중요한 자산이었다.


그녀는 해밀턴과의 사이에서 총 8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큰 아들인 필립 해밀턴(Philip Hamilton, 1782~1801)의 죽음, 남편의 스캔들을 모두 감내해 냈다.


특히 해밀턴의 레이놀즈 스캔들에 대해 일평생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수많았던 정적들의 조롱과 비난을 모두 극복해냈다.


알렉산더 해밀턴과의 결혼


해밀턴은 그녀를 부를 때, ‘엘리자(Eliza)’ 또는 ‘벳시(Betsey)’라는 호칭을 사용했고, 엘리자베스는 언제나 ‘나의 해밀턴’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이 내용은 해밀턴이 엘리자베스에게 보낸 수없이 많은 편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표현들이 해밀턴과 그녀가 얼마나 가깝고 서로를 사랑했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이다.



엘리자베스 스카일러 초상  <출처 : 위키피디아>



엘리자베스는 독립전쟁 중인 1780년대 초, 뉴저지 모리스타운에서 워싱턴 장군의 부관이었던 해밀턴을 만났다. 해밀턴은 그녀에게 미칠 듯이 빠져들었고, 전쟁의 바쁜 틈에서도 수많은 연애편지를 보냈다.


내용을 봐도 과연 냉철한 해밀턴이 썼을까 싶을 정도의 달콤하고 따뜻한 감정이 실린 내용이었다.


당시 미국은 보이지 않는 계급사회가 존재했고, 해밀턴은 자신의 근본과 처지가 너무도 미약한 점에 큰 자괴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신분상의 차이나 가문의 정통성에 대해 개의치 않았다.


아버지인 필립 스카일러도 마찬가지이었다. 오히려 두 사람의 결혼을 축복해 주었고, 당시 시대적 개념으로서는 굉장한 파격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1780년 12월 결혼에 성공했다.


엘리자베스의 어머니 <출처 : 위키피디아>


군에 다시 복귀한 해밀턴은 전쟁의 틈바구니에서도 엘리자베스에게 많은 편지를 보냈다. 그녀는 전쟁 중에 발생된 가족의 위기를 무사히 넘기면서 아들인 필립과 안젤리카를 낳았다.


해밀턴과의 사랑, 그리고 인내


이후 그녀는 해밀턴이 작성한 수많은 글과 내용을 접하게 되고, 이를 정리하는 역할을 도맡아 했다. 이 자료는 재부장관 시절에 작성된 수많은 보고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녀는 해밀턴이 작성된 글을 직접 읽어 주었고, 자문을 해 주기도 했다.


해밀턴은 군대에서 나온 후, 가족을 위해 뉴욕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1797년 레이놀즈 스캔들이 터졌다.


해밀턴은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기재하여 공개했다. 아마도 엘리자베스는 이 내용을 파악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평생동안 침묵으로 일관했다.


올버니의 스카일러 맨션  <출처 : 위키피디아>


당시 그녀는 친정인 올버니의 고향 집으로 돌아가 출산 준비를 하고 있었다.


1797년 9월 뉴욕에 다시 돌아왔는데, 장남인 필립이 장티푸스로 거의 사경을 헤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밀턴도 의식없는 아들의 모습에 절반은 미쳐 있었다.


부부는 끝까지 아들의 건강을 위해 노력했고, 필립은 깨어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녀는 해밀턴과 화해하고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 이후 2명의 자녀가 더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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