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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Jul 27. 2020

엘리자베스 스카일러 해밀턴 2

알렉산더 해밀턴의 부인

1801년 11월 장남인 필립이 세상을 떠났다.


장남 필립의 사망과 충격


아버지의 명예를 지키고자 벌어진 권총 결투에서, 상대방의 총에 맞아 사망한 것이다. 필립의 죽음은 해밀턴과 엘리자베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아들 필립 해밀턴의 초상화  <출처 : 위키피디아>


장녀이자 둘째인 안젤리카(1784~1857)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어머니를 닮아 성격이 무척 남자답고 씩씩했다고 전해 진다. 특히 오빠인 필립을 잘 따르고 유별나게 우애가 돈독한 사이였다.


오빠의 죽음을 목격한 안젤리카는 이 날의 충격으로 평생 정신적 장애를 안고 살아가게 다.


그녀(안젤리카)는 72세까지 살았는데, 이때의 기억(17살의 추억)에 평생을 사로잡혀 살았다. 오빠의 죽음이 그녀의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린 것이다.


다음 해에 8번째 자녀가 탄생하는데, 해밀턴과 엘리지베스는 장남의 이름을 따서 '필립'이라고 지었다.



해밀턴 그레인지  <출처 : 위키피디아>


1802년 해밀턴은 가족의 집을 마련하고자 의뢰했던 '해밀턴 그레인지'라는 신규 저택이 완성됐다.


이어지는 불행과 해밀턴의 죽음, 그리고 시련


1803년 엘리자베스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1804년 해밀턴이 결투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단 몇 년 사이에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큰 변화가 찾아왔다. 아들과 어머니, 여동생과 남편을 모두 잃어버린 것이다.


해밀턴은 결투 전에 엘리자베스에게 마지막 편지를 썼다.

 

“.. 보다 좋은 세상에서 당신을 다시 만나는 행복한 기대를, 영원히 가슴 속에 품고 있겠소. 안녕, 최고의 아내이자 최고의 여성이여. 나를 대신해 사랑하는 우리 아이들을 한 명 한 명 안아주오. 영원한 당신의 남편 AH"


해밀턴의 사망 이후 4달 후에 엘리자베스의 아버지마저 돌아가셨다. 이제 집안의 모든 것은 그녀의 손에 달려 있었다.


남편의 사망 후, 해밀턴의 빚이 다가왔다. 해밀턴은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을 남겨 놓지 않고 죽었던 것이다.


이로써 남편에 대한 세간의 오해는 풀렸다. 그가 영국으로부터 뇌물을 받았느니, 장관 시절 한 밑천 챙겨놨느니 하는 중상모략이 떠돌아다녔다. 모두 헛소문으로 밝혀졌다.



해밀턴의 흉상  <출처 : 위키피디아>


그녀의 아버지 유산 또한 사업 실패로 현금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필립 스카일러의 유산은 토지만 남아 8명의 상속자에게 배분되었다. 사실상 빚을 갚을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었다.


집(해밀턴 그레인지)은 경매에 부쳐졌고, 가족 몰래 친구들이 기금을 모집, 구입하여 식구들이 삶을 유지할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


경제적인 어려움


해밀턴의 죽음 이후 그녀는 평생 돈 걱정에 시달려야 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돈을 빌리러 다니기도 했다.


그녀는 해밀턴이 포기한 퇴직군인연금과 전쟁 시 포상으로 지급 되었던 토지의 권리도 다시금 요청했다. 해밀턴은 어려운 국가 경제를 생각하여 자신이 누릴 수 있었던 모든 권리를 포기했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선택은, 가족에게 힘든 경제적 어려움을 평생 안겨주었다. 



뉴욕 해밀턴 - 홀리하우스의 과거와 현재  <출처 : 위키피디아>


매디슨 대통령(4대 대통령) 퇴임 무렵, 해밀턴의 연금을 받을 수 있게 해 달라는 청원을 제출 했다. 그녀의 나이 80세(1837년)에 받을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1833년(당시 76세)에 집을 팔고 딸과 함께 뉴욕으로 이사를 다. 현재 '뉴욕 해밀턴 - 홀리하우스' 였다. 


강인한 정신과 확고한 의지


엘리자베스는 평생에 걸쳐 남편의 저술과 서신, 논문을 정리하고 재구성하였다. 현재까지 해밀턴에 대한 생생한 정보가 남아 있는 것은 그녀의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였다.


해밀턴 사후에도 벌어진 비방과 부정적 의견은 적극 대응하고 방어했다.


특히 제임스 먼로에게 직접적인 사과를 요청하는 등, 남편의 유산을 지키기 위해 헌신했다.


1825년 엘리자베스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해밀턴의 작품과 문서를 보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자료를 개방하였다.


그녀는 해밀턴의 사랑 고백이 담긴 노란색 메모와 마지막 편지를 조그마한 주머니에 넣고 목에 걸고 다녔다. 편지를 읽고 또 읽으며 남편에 대한 추억을 되새겼다. 장장 50년의 세월이었다.


아울러 강인한 정신과 확고한 의지로 자식들을 길러냈다.

 

살아남은 다섯 아들은 헌신적인 어머니의 도움으로 모두 다양한 경력을 가질 수 있었다. 법조계와 군인, 연방정부의 공무원이 되었다. 그의 후손들도 역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할만한 업적을 이어 나갔다.


 

1846년 트리니티 교회의 모습 < 출처 : 위키피디아>


그녀는 1854년 워싱턴에서 사망했는데, 소원대로 뉴욕의 트리니티 교회 남편 묘지 옆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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