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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Jul 28. 2020

엘리자베스 스카일러 해밀턴 3

알렉산더 해밀턴의 부인

엘리자베스의 삶은 해밀턴 죽음 이후 새로이 시작됐다.


어렵고 힘든 삶의 시작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이겨냈고, 넉넉했던 생활환경은 급격히 변했다. 사랑하는 이들의 연속적인 죽음과 큰 딸의 정신적 장애는 사실상 모든 것이 무의미할 만큼 삶의 기반을 무너뜨렸다.


엘리자베스 스카일러  <출처 : 위키피디아>


하지만 주저앉지 않았다.


언제나 ‘고통과 번뇌로 괴롭다’는 표현을 쓰기도 했지만, 자신만을 바라보는 자식들과 남편의 유산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 그녀를 지탱해 주었다.


남편의 죽음 이후 정치적인 정적들은 승승장구했고 연달아 대통령의 위치에 올랐다(3대 대통령 제퍼슨 - 4대 대통령 매디슨 - 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 - 6대 대통령 존 퀸시 애덤스).


해밀턴과 정치적 대척점에 선 제퍼슨 대통령  <출처 : 위키피디아>



남편의 사후 50년을 더 살았지만, 한 순간도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봉사하는 인생과 남편의 유산 보존


해밀턴의 유산과 자료를 찾아 멀리 떨어진 곳까지 직접 방문하여 받아오기도 했다. 나이 들어 늙어가는 정치인을 붙잡고 남편의 활동과 업적을 물어봤다. 그 시간이 30년을 넘겼다.


이 자료들을 기반으로 넷째 아들인 존 처지 해밀턴이 아버지의 전기를 작성했다.



넷째 아들 존 처지 해밀턴  <출처 : 위키피디아>


현재 그녀에 대한 자료는 많이 남아 있지 않다.


해밀턴의 업적을 정리하고자 본인의 내용을 배제한 영향도 있지만, 자신의 삶에 대해 자랑스러워한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엘리자베스의 업적은 결코 지 않다.


그녀는 평생 동안 고아들을 위해 헌신했는데, 뉴욕 최초의 사설 고아원인 '그레이엄 윈덤(Graham

 Windham)'을 설립한 것이다.


뉴욕 고아원 그래이엄 윈덤의 초창기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그레이엄 윈덤(Graham Windham)과 일화


고아들을 사랑하고 아낀 것에 대한 일화가 수없이 많았다.


특히 남편 해밀턴의 어린 시절에 대한 얘기를 들은 이후, 부모 잃은 자식들에 대한 애정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해밀턴과 더불어 철저한 노예제 폐지론자였다. 이웃에 사는 노예 아이들과 허물없이 어울렸고, 노예제를 주장하는 정치인들을 경멸하고 조롱했다.


그녀에 대한 세간의 평은 ‘햇살처럼 밝은 성품과 유머 감각을 지닌, 온화하고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그래이엄 윈덤의 20세기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그렇지만 고아원을 운영하는 업무에 대해서는 달랐다.


강한 정의감과 이타심으로 고아원을 이끌어 나갔다.


해밀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예상되는 행정 능력은 나이가 들어서도 조금도 줄지 않았다.


고아원 이사회 참여를 시작으로, 부회장직을 거쳐 총책임자가 되기도 했다. 그녀는 거의 모든 일을 도맡아 처리했다. 이 중에는 고아원 기금 모임 주체, 시설 대여, 불편사항 접수 및 개선, 연방정부 기금 예산 관리 등도 포함되었다.


그래이엄 윈덤 자원봉사자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가장 중점을 둔 것은 학생들의 장래 진학과 인생에서의 기반 마련이었다.


읽고 쓰게 한 것은 물론, 지금보다 더 나은 생활을 위해 일거리를 마련해 주었다. 상급 학교에 많이 갈 수 있도록 직접 추천 편지를 써주거나 도와주었다. 교육 시설을 마련하기 위해 주 정부 예산을 배정받기 위한 로비도 서슴지 않았다.


그녀의 90세가 넘은 초상화를 보면, 여전히 생기 있고 맑은 눈에, 굳게 다문 입술에서 강인함과 굳은 의지를 엿볼 수 있다.


94세의 엘리자베스  <출처 : 위키피디아>


엘리자베스의 행복과 삶의 마감


80세가 넘은 시절에도 기차역에서 마차를 타지 않고 직접 걸어서 마을까지 올 정도로 본인만의 투지와 의지력은 대단했다. 이런 모습에서 사람들은 절로 존경심과 함께 감탄의 언사를 쏟아냈다.


하지만 그녀의 행복은 따로 있었다.


오랜 기간 상복을 벗지 않고 있었고, 해밀턴의 흉상을 가장 아꼈으며, 그가 써준 편지를 평생 동안 간직하고 살았다. 가장 중요시했던 보물은 해밀턴이 보내준 사랑의 글귀가 적힌 편지였다.



뉴욕 맨해튼의 트리니티 교회 <출처 : 위키디피아>


그녀는 나이 97세에 세상을 떠났고, 살아있을 때 언제나 입버릇처럼 말했던 남편의 옆자리, 트리니티 교회의 해밀턴 묘 바로 옆에 묻혔다.



(이번 글은 《알렉산더 해밀턴》, 21세기 북스, (론 처노 지음, 서종민·김지연 옮김) 중

<에필로그 - 엘리자> 부분에서 발췌, 정리한 내용임을 밝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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