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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팔 Oct 07. 2020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페널티킥 앞에 선 골기퍼의 불안

축구만큼 역동적이고 가슴 조이며 볼 수 있는 스포츠는 없다. 22명의 거친 남성들이 뿜어내는 열기와 골망이 출렁이는 극적인 순간은 다른 경기에는 맛볼 수 없는 희열과 감동을 제공한다. e-스포츠에서도 축구(FIFA 온라인)는 단연 인기 있는 게임이다.


축구에서 지옥과 천당을 오가는 포지션은 맨 마지막에 위치한 골키퍼다.  

골키퍼는 포지션 특성상 잘 막아야 본전이고 실점하면 곧바로 역적이 돼버린다. 물론 본전 이상의 신들린, 작두탄 선방을 보여주는 선수들도 있다. 골키퍼들의 경기 중 활약도 그렇지만 가장 빛나는 순간은 역시 페널티킥(또는 승부차기)에서 나온다.


페널티킥은 11m 거리ㅡ인간이 가장 공포심을 갖는다는 높이이기도 하다ㅡ의 승부로 그 상황의 긴장감이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박빙의 경기에서 나오는 페널티킥은 관중들도 맨 정신으로 보기가 아찔한데 직접 맞닥뜨리는 키커와 골키퍼의 심리적 압박감, 중압감이란 오죽하겠는가. 보이지 않는 멘털의 강약이 갈리는 순간이다. 이론적으로는 페널티킥을 막을 수 없기 때문에 키커보다는 골키퍼가 느끼는 부담감이 더 클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래서 골키퍼들은 일종의 그들만의 마인드 컨트롤로 이 위기를 이겨낸다. 브라질 월드컵 당시 네덜란드와 코스타리카의 8강전 승부차기 때 네덜란드 골키퍼 팀크룰은 상대편 키커한테 가서 “나는 네가 어느 방향으로 볼을 차는지 알고 있다”라는 기싸움과 자기 암시로 2골을 막아냈다. 독일의 전설적인 골키퍼였던 제프 마이어는 평소 유머러스한 생활로 유명하다. 그것은 골키퍼라는 또 다른 정체성이 갖는 극도의 긴장과 스트레스를 이겨내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극작가 피터 한트케의 작품 중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이란 다소 실험적이고 사유적인 제목의 책이 있었다.(주인공이 전직 골키퍼였을 뿐 내용은 축구와 그다지 상관이 없다)

소설 마지막 축구경기를 보러 온 주인공이 바로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심리에 대해 옆 사람과 대화를 한다.

“골키퍼는 저쪽 선수가 어느 쪽으로 찰 것인지 숙고하지요. 그가 키커를 잘 안다면 어느 방향을 택할 것인지 짐작할 수 있죠. 그러나 페널티킥을 차는 선수도 골키퍼의 생각을 계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골키퍼는, 오늘은 다른 방향으로 공이 오리라고 다시 생각합니다. 그러나 키커도 골키퍼와 똑같이 생각을 해서 원래 방향대로 차야겠다고 마음을 바꿔 먹겠죠? 이어 계속해서, 또 계속해서...”

소설 속의 키커는 어이없게도 한가운데로 공을 차 버린다. 어느 방향으로 공을 차야 할지 결정을 하지 못하고 긴장 속에서 찬 것인데 아뿔싸!  바로 거기에 골키퍼가 떡 버티고 서 있었다. 골키퍼 역시 어느 한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그냥 중앙에 가만히 서 있다가 얼떨결에 킥을 막은 것이다. 결국 어느 누구도 쉽게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가 어이없는 결과를 마주하고 만다.


평생 동안 우리는 얼마나 많은 선택을 하고 그 결정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때론 부조리하거나 무기력한 상황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오늘을 살아가며 불안을 느끼는 우리 삶의 모습이 이 골키퍼들의 심적 상태와 어딘지 닮아 있지는 않은가? 책에서는 소통이 단절되고 정돈된 질서에 순응하지 못하는 주인공에 대한 비유로서 골키퍼의 역할이지만 주인공이나 골키퍼 모두 상실되고 거세된 현대인의 모습이고 자아일 수 있다.


삶은 하나의 욕망을 또 다른 욕망으로, 하나의 불안을 또 다른 불안으로 바꿔가는 과정이라 했다. 끝없는 욕망이고 불안이다. 요즘 뉴스에 50대 불안장애 환자가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비정상적 불안과 공포, 스트레스가 일으키는 주 요인이다. 내게 있어서도 불안은 일상이다. 욕망이 없는 불안이라는 점에서 더 심각하다.  

페널티킥에 대한 골키퍼의 마인드 컨트롤처럼 내게 있어서 불안을 잠재우는 믿는 구석이란 바로 종교적 믿음이다. 다만 순도 100%의 믿음이 아닌 터 라 불안의 본질을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소위 기도발이 잘 먹히지가 않는다는 거다. 불안의 끝이 곧 잘 상실감으로 찾아오곤 한다. 때론 그 불안은 영혼마저 갉아먹는다.

영혼의 목소리는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잠언적 영화 제목처럼 내 귓가에서 이렇게 속삭인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라고...

결국 나도 불안장애 환자들의 증가에 한 몫하고 있는 셈이다.


“골키퍼는 공이 라인 위로 굴러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골키퍼의 영원 같았던 긴장이 끝나는 순간이지만 그의 손을 떠난 공은 그렇게 골라인을 지나고 있다. 한때 대학시절 골키퍼였던 알베르 까뮈의 말처럼 결국 공은 내가 원하는 대로 오지 않는 법이다.

삶은 원래 그런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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